[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때 가능한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교인들은 나를 ‘울보 목사’라 부른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설교를 하다가도, 기도를 하다가도, 심방을 하면서도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린다고 붙여준 내 별명이다.

내가 생각해도 이상할 따름이다. 지금까지 40여 년 가까이 사역하는 동안 목회가 힘들거나 성도들이 속을 썩여서 눈물을 흘려본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유독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거나 그들의 사연을 듣고 말할 때면 눈물이 흐른다. 그 뿐 아니다. 가난한 이들이 이유 없이 무시를 당하거나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볼 때도 눈물이 흐른다.

사람들이 많이 실수하는 것 중 하나가 가난을 게으름이나 어떤 잘못의 결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무시하는 태도로 가난한 이들을 대하거나 외면하기 쉽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사람들은 자신의 힘만으로 헤쳐 나가기 힘든 현실에 빠질 때가 있다.

가난이 그 현실 중 하나다. 스스로의 게으름이나 잘못으로 인해 가난할 수도 있지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가난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사도행전에는 성전 미문에 앉은 장애인이 등장한다. 그는 처음부터 걷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태어났기에 평생을 구걸하며 살 수밖에 없었다.

우리 동네 금남시장 뒤에 살고 있는 윤영자 할머니의 왜소증 아들과 딸은 게으르거나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궁극적으로 이 세상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이후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전한 모습에서 뒤틀렸다. 가진 사람은 나누어 주려하기보다 남을 속이거나 빼앗아서라도 더 가지려 한다. 인간의 죄악이자 타락의 결과다.

가난한 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선택지는 분명하다. 함께 우는 것이다. 성경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다. 설령 가난이 본인의 게으름이나 잘못의 결과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는 예수님의 말씀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눈물은 내가 흘리는 것이지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내 의지나 힘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우리의 사랑은 제한적일 뿐이고 곁길로 빠지기 일쑤이다.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만족이나 자기 위안인 도덕적 사치일 때가 많다.

예수님 역시 성령의 능력을 입어 일하셨다. 예수님의 삶은 놀라운 기적의 연속이었다.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고, 눈 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하셨고, 나병 환자를 고쳐 주셨고, 귀신들린 자를 온전하게 하셨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려 주셨다.

그분의 말씀은 신비스러움 그 자체였다. 땅의 언어가 아니라 하늘의 언어요,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하늘 권세의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영성을 이야기할 때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신적인 모든 능력이 있었다고 말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가 인간의 몸을 입고 시간과 공간이 있는 역사의 한복판에 오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 예수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삶의 능력을 배울 수 있는 연결점을 찾을 수 있다.

예수님의 신비스러운 초자연적인 구원 사역은 성령의 세례가 임함으로 시작되었다. 이는 그의 공생애 시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은 때가 차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외치는 자였던 세례 요한을 찾아가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구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위에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셨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성령이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능력 있는 사역의 근원이다. 그전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이 겸손히 세례요한을 찾아 갔듯이 우리 역시 자신을 낮추고 회개하고 사모하며 능력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위로부터 성령과 능력이 임하기를 사모해야 한다. “성령이여, 이 시간 나에게 찾아 오셔서 나를 도우시고 충만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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