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효 목사(김제 행촌교회)

긍휼을 원하시는 주님께 모두 맡기는 믿음의 삶 삽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에돔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가 칼로 그의 형제를 쫓아가며 긍휼을 버리며 항상 맹렬히 화를 내며 분을 끝없이 품었음이라 (암 1:11)

 

이신효 목사(김제 행촌교회)
이신효 목사(김제 행촌교회)

74주년 광복절을 보냈습니다. 우리나라에 해방의 감격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다시금 감사드립니다. 일제 말기 마지막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는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로 평가받던 일본 관동군을 창설했던 사람입니다. 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 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아베 노부유키가 마지막 총독부 업무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일본은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데 조선민이 제 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게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따라서 조선민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인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1945년 4월경 아베 노부유키가 당시 민족 지도자라는 송진우 선생과 장덕수 선생을 불러 이렇게 당부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 일본이 패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조선의 경찰권, 군사권, 납세권, 재정권을 포함한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넘겨주겠으니 당신들이 조선의 정권을 맡아 주시오. 단, 한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이 끝나면 일본 사람들과 일본 군인들을 일본 본토까지 안전하게 보내주는 것입니다. 이 요구를 받아주는 조건으로 이제부터 조선의 정권을 맡아주시오.” 그때 송진우와 장덕수, 두 사람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일본 제국이 왜 망합니까? 천황폐하의 군대가 왜 집니까?” 민족의 장래와 역사의 앞날을 전혀 내다보지 못한 수치스러운 반응이었습니다.

민족주의자요, 민족의 지도자라던 사람들이 민족의 미래와 역사의 내일을 전혀 내다보지 못하고 패망한 일제 총독 앞에서 한심하게 반응하던 그 시절, 윤동주 선생님은 민족의 앞날을 내다보는 아주 짤막한 시를 한편 지었습니다. “새벽이 되면 나팔소리 들려올 거외다.” 윤동주 선생님은 2000만 겨레 모두가 조국 해방의 여명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는 듯, 조국 해방을 맞아 환호하며 불어 재낄 나팔소리가 들리는 듯, 다가오는 그날의 감격을 담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 윤동주 선생님의 눈에는 이렇게 해방된 조국과 감격하는 겨레의 장래 모습이 보였던 것입니다. 진실하게 예수 믿는 사람, 진지하게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사모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 사람의 귀로 듣지 못하는 것, 세상 지식과 상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듣게 됩니다. 깨닫고 노래합니다.

윤동주 선생님의 시 ‘십자가’는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있습니다”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2000만 겨레가 염원하며 기다리던 해방에 대한 간절한 소망은 민족주의자들조차도 포기하고 절망하고 있는 당시에도 오직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치듯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조국 해방의 소망이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당 밖에는 남아 있는 곳이 없다는 절규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해방 조국의 내일을 확신하며 바라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김교신 선생님은 양정고보 교사로 재직할 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손기정을 교육하고 길렀던 분입니다. 시인 구상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순수한 글이 있는가? 하나 밖에 없다. 누구의 글인가? 김교신의 글이다.” 패망할 일제의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 앞에서 송진우 장덕수가 “왜 일본이 망합니까? 천황폐하의 군대가 왜 집니까?”라며 한심하고 수치스럽게 반응했던 그 시절, 조선의 지도를 걸어둔 벽 앞에 무릎 꿇고 엎드려서 2시간 동안을 기도한 후에 글을 썼다는 김교신 선생님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오른손(右腕·우완)은 만주평야를 훑어서 낭림산을 지나 백두산 정상을 움켜쥐고, 왼손(左腕·좌완)은 묘향산을 지나서 황해도 장산곶을 움켜잡고, 오른쪽 팔은 태백산을 지나서 멀리 부산까지 뻗치고, 왼쪽 팔은 소백산을 지나서 전라도 진도까지 뻗쳤다…바야흐로 하늘에 솟아오르려는 모습인가, 아니면 자유의 여신이 아시아 대륙을 등 뒤에 걸머지고 일어서려고 허리를 펴는 모습인가.”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과 민족지도자들까지도 조국 독립과 해방에 대한 꿈을 포기한 채 절망하고 있을 때, 김교신 선생님은 눈앞에 펼쳐진 조선 지도를 바라보면서 “만주 땅과 한반도를 움켜쥐고 하늘을 향해 솟구치려고 웅크린 호랑이의 기개”를 보았고, “자유의 여신이 소련 땅, 만주 땅, 이 아시아 대륙을 등 뒤에 걸머지고 일어서려고 허리를 펴고 있는 웅지”를 보면서 노래합니다. 조국의 지도를 바라보는 예수 믿는 사람, 김교신 선생님의 눈에는 그런 기개와 웅지가 보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을 뜨고, 민족의 선각자가 보았던 역사의 빛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나라와 겨레에 대한 믿음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잘했다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짐, 짐을 진 자’라는 뜻의 이름입니다. 아모스는 드고아에서 목자와 농부로(암 1:1, 7:14) 생활하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아모스가 북이스라엘 왕국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았을 때 처음에는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7:2,5) 그러나 아모스는 하나님의 소명에 이끌려 예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7:15) 주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8) 북이스라엘의 멸망이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닫고, 남유다를 떠나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선지자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선지자 아모스가 활동하던 때는 남유다 왕 웃시아와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함2세가 통치하던 시기입니다. 아모스는 여로보암2세 시절 우상숭배의 중심지인 벧엘과 수도 사마리아, 그리고 길갈을 오가면서 예언했습니다. 여로보암2세의 북이스라엘은 모압과 앗수르와의 전쟁에서 계속 승리함으로 옛 영토를 회복하여 영역을 확장했고, 수도 사마리아와 벧엘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웠습니다. 겉보기에는 강력하고 부유한 국력을 보여주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우상숭배와 부도덕과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불행한 북이스라엘의 앞날을 보면서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부도덕함과 사치와 향락을 지적하여 책망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아모스서의 목적은 이렇게 눈앞에 다가온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하며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이스라엘의 죄 때문임을 지적하고, 이스라엘이 회개하라고 촉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아모스는 단순히 재앙을 예언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그 재앙의 끝에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선포합니다. 이 회복과 구원을 위해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1~2장에서 예언으로, 3~6장에서 설교로, 7~9장에서 환상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1장 1~2절의 표제에 심판이 선언되었고, 먼저 열방의 심판이 있고, 다음으로 이스라엘의 심판이 따릅니다. 아모스 1장 1절~2장 3절에서는 열방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열방에 대한 심판은 다메섹(1:3~5), 블레셋(1:6~8), 두로(1:9~10), 에돔(1;11~12), 암몬(1:13~15), 모압(2:1~3)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유다와 이스라엘의 심판이 2장 4~16절에 나옵니다.

열방의 심판에 대한 예언의 특징은 “서너 가지 죄”라는 구절이 공통적으로 나오고, 그 심판의 방법은 ‘전쟁의 참화’입니다. ‘전쟁의 참화’는 “불을 보내어”라는 구절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선지자 아모스는 이스라엘 가까이에 있는 이방 민족들의 죄도 철저하게 지적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합니다. 요즘 시대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죄의식이 너무나 희박합니다. 종말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 없습니다. 죄를 죄로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을 감정에 맡기고 살 때가 너무 많습니다. 이런 때 선지자 아모스가 본문 11~12절에서 ‘에돔’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와 우리의 ‘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와 아모스가 사역하던 시대의 이스라엘이 얼마나 비슷한지 모릅니다. 본문 11절에 지적된 에돔의 죄는 칼로 형제를 쫓아가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 21~26절과 7장 1~5절에 보면 형제에 대한 교훈이 있습니다. ①형제에게 노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했습니다. ‘라가’는 히브리인의 욕설로 머리가 텅비다, 골빈 놈, 교육도 없고 도덕적으로도 보잘 것 없는 사람을 경멸할 때 쓰는 말입니다. ②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형제와 화목한 후에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③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 속의 들보를 빼라고 합니다. 그래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4~16절, 4장 20절, 5장 16절에도 형제에 대한 권면이 나옵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형제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6절의 ‘사망에 이르는 죄’에 대해 마태복음 12장 31절은 ‘성령을 훼방한 죄’라고 말씀합니다. 칼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 이단사상’이라고 설명합니다. 클락은 ‘회개하지 않은 죄’라고 합니다.

본문 11절에 지적된 에돔의 죄로, “긍휼을 버리며”라고 지적합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은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하면서,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긍휼이 여기는 자는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9장 13절에 보면, 예수님은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십니다. 로마서 9장 13절에 보면, 하나님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긍휼로 인하여 삽니다. 긍휼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삽니다. 이 시대의 죄, 내가 고백할 죄를 찾아서 모든 죄 짐을 대신 지시고 모든 죄 값을 대신 치러주신 주님께 다 맡기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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