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부산기윤실 공동대표)

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부산기윤실 공동대표)
최현범 목사(부산중앙교회·부산기윤실 공동대표)

올해 6월 독일에 머물던 중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키르헨탁(Kirchentag)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교회의 날’이라는 뜻의 이 축제는 독일의 개신교회가 각 도시를 돌며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행사다. 이 축제는 매번 총리를 비롯해서 2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하면서 교회뿐 아니라 독일 사회의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특별히 이번에는 이 지역의 한인교회들이 연합하여 전시장 안에 ‘한국관’을 설치하고, 그 중심에 소녀상을 세웠고 많은 방문자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독일 땅에서 한인교회들에 의해서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진정한 참회를 위한 각고의 노력의 결과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진 독일. 지나간 역사를 왜곡하면서 여전히 과거의 멍에를 메고 살아가는 일본. 그 일본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당하여 크고 작은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국. 그리고 그 나라의 국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서 용서와 화해라는 문제로 씨름해야 하는 한국의 그리스도인이 여기에 다 모여 있는 듯 했다.

우리 기독교는 용서의 종교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했음을 선언하는 곳이다. 그러나 그 용서는 먼저 진실한 회개를 전제로 한다. “회개하라!” 이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의 첫 메시지였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죄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돌이키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특별히 그 죄로 인해 누군가가 큰 고통을 겪었을 때에, 그 앞에서 “나 때문이오”라고 인정하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아픔의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과거의 죄는 여전히 내 안에 죄로 머물러 나의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붙잡게 된다.

이러한 원리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에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가 자신들이 저지른 죄를 제대로 깨닫고 그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개인보다도 훨씬 더 어렵다. 독일 역시 1000만명이나 사망하게 한 1차 세계대전의 주범이었지만, 패전 후에도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돌아보지 못했다. 그러더니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다시금 5000만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2차 세계대전의 주범이 되고 말았다.

독일은 전쟁의 패배로 완전히 망한 뒤에야 비로소 철저히 참회할 수 있었다. 나치시대에 행한 반인륜적인 행위들을 숨김없이 드러냈고, 그 치부의 중심이 되는 강제수용소들을 기념관으로 만들어 자녀들이 계속해서 교훈을 받도록 했다. 이웃나라들에게 끊임없이 사죄를 반복하고 새로운 희생자가 드러날 때마다 배상을 해나가고 있다.

1970년 폴란드를 방문한 브란트 수상은 바르샤바의 추모지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당시 독일인 가운데도 브란트 수상의 행동이 지나치다며 비난하는 이가 더 많았지만, 지금은 모두가 과거의 독일과 결별하게 한 용기 있는 행위로 칭송하고 있다.

전후 일본은 이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식민지배와 전쟁 중에 벌인 만행을 숨기려 하고, 위안부 문제와 같은 분명한 사실조차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과거를 미화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자신들을 전쟁의 피해자로 둔갑시키려 하고 있다. 진정한 돌이킴이 없다보니 과거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 꾸준히 우경화의 길을 가면서 오늘날의 아베정권을 만들고 말았다. 작금의 한일갈등에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1995년 일본에 초청된 독일의 바이체커 대통령은 ‘종전 50년의 독일과 일본’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다. 당시 일본은 왕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게 ‘유감’, ‘사죄’, ‘통한의 염’ 등 어떤 단어로 사죄해야 하는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대한 조언을 요청받은 바이체커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갖는 경험이 국가 간의 관계에서도 적용이 된다고 봅니다. 사죄의 말은 자주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할 때 비로소 가치가 있고 유효한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진심으로 잘못했다고 생각지 않는다면 어떤 용어를 쓴다 해도 결국 단순한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할 뿐이라는 쓴 소리였다. 일본의 권력자들이 같은 전쟁의 주범이요 패전국이었던 독일로부터 제대로 교훈을 받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국교회는 한일관계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돌아보아야 한다. 차라리 우리나라가 이웃나라에 피해를 입혔다면 교회의 목소리는 단순할 것이다. 우리 정부에게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촉구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피해자이다 보니 교회가 서야할 자리가 좁아진다. 우리는 일본정권의 거짓과 불의한 행위에 대해서는 책망해야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민족 간에 깊은 증오의 골로 발전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남북문제뿐 아니라, 한일문제에 있어서도 큰 틀은 용서와 화해이다. 그 길이 좁고 어렵다할지라도 교회는 언제나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화해의 사도로서 역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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