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정치’. 귀에 익숙한 단어다. ‘정치꾼’. 좋은 어감은 아니지만 이것 역시 익숙하긴 마찬가지다. 정치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정치는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것”이라 정의한다. 이런 정치를 국가의 경우 주로 통치자나 직업적 정치인들이 주도하기 마련이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일반적으로 사람은 정치적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둘만 모여도 정치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타협을 하고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해주며 공존하는 것이 정치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이 모이면 사회가 이루어지고, 그러기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그 집단을 운영하기 위한 정치를 펼치기 마련이다. 또 그렇게 정치하면서 정치의 기술도 발달했다. 거의 예술에 가까운 정치를 펼치는 나라도 있다. 따라서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나의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총회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모여 집단을 형성한 것이기에 사회일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현실세계이다. 그래서 정치는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왜 ‘총회 정치’라고 하면 부정적 뉘앙스가 강할까? 그리고 그것을 잘 하거나 좋아하는 인사들에게 왜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닌 ‘정치꾼’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일까?

정치를 통해 그가 속한 집단의 공동이익이나 절대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당위성을 버렸기 때문이다. 개인이나 나의 이기적 소집단의 이익을 담보하기 위한 뒷거래를 정치로 오해하면 정치는 부정적 이미지를 덮어쓰기 마련이다. 부정한 일에 반드시 일벌백계로 두 번 다시 반복되는 잘못을 못하도록 해야 함에도 ‘정치’를 앞세워 유야무야하는 것조차 정치력이라 자랑하는 모양새는 서글프기만 하다.

절대적 의미의 교회와 그 가운데 펼쳐야 할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희생이나 집단의 손실을 최소화시키고 최대한의 사람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정치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채 몇몇 사람들의 자리와 이권을 챙기다보니 정치라는 필수불가결한 행위가 더럽혀지는 것이다.

104회 총회가 다가오면서 곳곳에서 정치로 바쁜 모양이다. 그래서 9월은 가을의 문턱이라기보다 정치의 계절로 훅 들어가는 길목인 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기대 반, 걱정 반’이다. 제발 하나님 나라에 적절한 정치를 바르게 펼칠 가치관과 사명감이 적절하게 녹아있는 정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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