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구제는 교인 모두를 일깨우는 일이기도 했다. 옥수동과 금호동이 재개발된 지 5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 교회 교우들 중 절반은 원주민이고, 남은 절반은 이주해 온 아파트 주민들이다.

사통팔달 교통망에다 강남이 지척인지라 옥수동과 금호동 아파트 값은 강북 최고 수준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자연히 새로 이주해 온 아파트 주민들은 과거 달동네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다. 젊은세대일수록 더 그렇다. 그런 교인들이 자의반 타의반, 교회의 구제 사역에 참여하면서 여러모로 생각이 바뀌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 가지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이웃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 가지로 살아가야 한다.

특별히 우리 교회가 매월 시행하는 ‘5만원 사랑 나누기’ 즉, ‘불신 장애인 나눔 사역’에 참여하는 봉사자들 상당수가 아파트에 사는 30~40대 젊은 주부들이다. 처음에는 같이 봉사를 가자니까 절반의 의무감과 함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석했던 집사들이 이제는 자원하는 마음과 진심어린 긍휼의 마음으로 봉사에 나서는 것을 본다. 많이 배우고 곱게 자랐을 사람들이 못 배우고, 가난하고, 오랜 시간 질병에 힘들어하는 이웃의 손을 잡고 기도하며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봉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는 것과, “나에게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구제는 영적 비만증을 해결하는 길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5장에는 하나님께서 가지치기를 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1절에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하시면서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불필요한 가지는 여지없이 잘라버리시는 분이다. 우리는 필요없는 쓰레기를 가장 소중한 것처럼 간직하며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의 힘과 시간을 낭비시키는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대로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

예수 안에 있으면서도 막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가 있다면 잘라버려야 한다. 그 가지를 자르지 못하면 열매를 맺어야 하는 다른 가지에 치명상을 입히기 때문에 빨리 자를수록 좋다. 그러나 불필요한 가지라도 자르는 데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아픔 때문에 결단하지 못하고 주저한다.

자기 스스로 자르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자르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과수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모두 열매 맺는 것이 아니다. 농부는 탐스럽고 풍성한 열매를 위하여 불필요하거나 좋지 못한 것들은 미리 잘라버린다. 반면 남은 가지들에는 약을 뿌리고 종이로 싸주고 비료를 주어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 준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는 가지에 대해서는 더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이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영적인 비만증에 걸려 있는 사람들은 살을 빼는 훈련을 해야 한다. 아름답고 큰 예배당과 부족함이 없는 시설에서 좋은 설교를 많이 들으면서 영적인 만족을 누릴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자기가 큰교회 다니는 것이 마치 자기 능력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복감에 젖는다. 그리고 작은교회에서 봉사하고 수고하는 이들을 능력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바보 같은 생각들이다.

세상은 우리의 웅장한 예배당으로, 좋은 설교로도 감동을 받지 않는다. 세상은 우리가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고 열심 있게 출석한다고 절대 감동받지 않는다. 세상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줄줄 꿰는 성경연구로도 감동을 받지 않는다.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의 제자로 인정하는 순간은 바로 우리가 누구도 사랑하기 어려운 작은 이웃들까지 끌어안고 봉사하는 손길과 수고하는 발을 보여줄 때이다. 그래서 라브리 운동을 한 고 프랜시스 쉐퍼 박사는 “사랑은 예수 제자들의 뱃지이다”라고 했다. 사랑이 세상의 필요인 것이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외로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고, 가려진 곳에 사는 약하고 힘없는 자들과 함께 울고 웃는 마음이다.

이런 찬송의 가사가 생각난다. “세상 모두 사랑 없어 냉랭함을 아느냐 곳곳마다 사랑 없어 탄식소리 뿐일세. 악을 선케 만들고 모든 소망 채우는 사랑 얻기 위하여 저들오래 참았네.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 없는 까닭에. 사랑위해 저희들 오래참고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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