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 없는 애국신앙, 교회 공동체 긍지되다
강직한 신앙 전통 이어온 여수제일교회서 사역, 한국전쟁 중 동료 교인들과 순교

전도사님은 팔 하나와 눈 한 쪽이 없었다. 철없는 아이들은 그 앞에서 함부로 놀리며 장난치거나, 반대로 무섭다고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연을 알고 난 뒤에는 모두가 그녀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됐다. 여수제일교회(김성천 목사)의 순교자 윤형숙 전도사 이야기다.

여수제일교회에서 사역하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윤형숙 전도사의 묘역.
여수제일교회에서 사역하다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윤형숙 전도사의 묘역.

윤형숙 전도사는 1900년 여수 화양면에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그녀는 가난한 살림 때문에 친척인 남원의 윤성만 장로 댁으로 옮겨 살며 기독교 신앙을 얻게 됐다. 그리고 윤 장로의 주선으로 순천의 존 프레스톤(한국명 변요한) 선교사를 만나 거처를 다시 그의 집으로 옮기며 순천선교부가 운영 중이던 은성학교(매산학교 전신)에 입학했다.

은성학교는 그녀에게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었다. 열심히 배워 조국을 위해, 동포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1916년 일제의 탄압으로 은성학교가 폐교하며 윤형숙은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광주 수피아여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갈 기회를 얻게 된 그녀의 이름은 ‘윤혈녀’(尹血女)로 바뀌어있었다. 사뭇 비장함이 느껴지는 이 이름의 진가는 수피아에 입학한 이듬해 벌어진 만세운동에서 발휘된다. 1919년 3월 10일 양림동 수피아여학교 교정에서 발원한 광주지역 만세운동에서 그녀는 태극기를 휘두르며 선봉에 섰다.

윤형숙 전도사가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팔이 잘리는 광경을 묘사한 부조.
윤형숙 전도사가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팔이 잘리는 광경을 묘사한 부조.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날에 윤혈녀는 그만 왼팔을 잃는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상태에서 체포된 그녀는 혹독한 고문으로 오른쪽 눈까지 실명하며 4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형기를 마친 후 4년간 일본 군부대에 유폐를 당하기도 한다. 이 끔찍한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 윤치운은 상심한 나머지 그만 몸져눕고 세상을 떠난다.

엄청난 비극을 겪고 나서도 그녀의 애국신앙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출옥 후 함경도 원산의 마르다윌슨여자신학교에서 잠시 수학하다가 전주 기전학교 기숙사 사감직, 고창읍교회 유치원 교사직 등을 거친 후 고향 여수로 돌아와 여수제일교회에 출석한다.

여수제일교회의 전신인 여수읍교회는 1906년 12월 10일 부산 동래에서 이주해 온 김암우(박바우) 여사가 여성들을 전도해 군자동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며 시작된 공동체이다. 이후 변요한 선교사와 동역하던 조의환 전도사가 부임해 1910년 2월 5일 정식으로 설립된다.

초창기부터 여수제일교회는 애국신앙을 가슴에 품은 목회자들이 강단을 지키며 성도들을 이끌었다. 초대 곽우영 목사는 목포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옥고를 치른 인물이었으며, 교회 설립자이자 3대 담임목사로 돌아온 조의환 목사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제주에서 체포된 이력을 가졌다.

윤형숙 전도사의 추모비와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건국포장.
윤형숙 전도사의 추모비와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건국포장.

윤 전도사가 여수제일교회에 출석하던 시절 담임목사였던 제4대 김순배 목사도 일제에 의해 두 차례 수감될 만큼 강직한 신앙을 지닌 지도자였다. 김 목사를 도와 집사로 섬기며, 여수제일교회가 설립한 봉산학원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그녀는 학생들에게 처음에는 신체 불구로 인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나중에는 독립열사라는 존경의 대상으로 각인됐다.

해방 후 순천성경학교에서 전도사 과정을 마치고 여수제일교회와 봉산교회에서 활동하고, 고향인 화양면에서 확장주일학교를 열어 복음을 전파하는 등 왕성하게 사역하던 기간은 아마도 윤형숙 전도사에게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한 순간도 짧게 끝나고 말았다. 여순사건에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하며 이 지역의 많은 기독인들이 희생됐고, 그 희생자들의 명단에 ‘윤형숙’이라는 이름도 새겨진 것이다. ‘외팔이 선생’ ‘제2의 유관순’이라는 유명세와 함께,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반공인사로 인식되어 온 그녀를 좌익과 인민군들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1950년 9월 28일 여수경찰서에 수감되어있던 기독교인들과 우익인사들은 ‘민드래미’라 불리던 둔덕동 야산으로 끌려갔다. 총구가 그들에게 겨누어졌고, 곧이어 수많은 목숨이 이생을 떠났다. 그렇게 윤형숙은 손양원 조상학 지한영 지준철 허상용 황도백 곽은진 안경수 등과 함께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의 시신은 고향 마을에 묻혔다. 미리 죽음을 예감하고 자신의 묘소에 광주에서 잘린 한 팔을 찾아 함께 묻어달라고 했던 유언은 안타깝게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순교한 이듬해 4월 15일 여수제일교회 성도들이 그녀의 묘소에 순교기념비를 세우고, 2004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며 윤형숙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생애를 기렸다.

독립유공자로서 그리고 순교자로서 그의 삶은 글과 그림 혹은 영상을 통해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KBS는 ‘이방인과 3·1운동’이라는 제목의 특별다큐멘터리를 통해 윤형숙의 삶을 조명했고, <한겨레>는 ‘민중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그녀를 선정했다.

여수제일교회는 한국전쟁 당시 윤형숙 전도사 외에도 김은기 집사라는 아까운 인물 한 사람을 더 잃었다. 여수제일교회는 교회당에 이들을 추모하는 비석을 세우고, 전기집 발간 등 순교신앙 계승에 열심을 보여주었다.

김성천 목사는 “해마다 순교기념일이 돌아오면 교회 내 역사위원회 주관으로 추도식을 열며 고인의 신앙과 생애를 되새긴다”면서 “살아있는 순교자로서 이 시대를 짊어지자는 다짐을 온 교회가 함께 나눈다”고 말한다.

여수노회는 올해 제104회 총회에 두 사람을 총회순교자명부에 정식 등재해 주도록 헌의했으며, 순교자 등재가 이루어지면 순차적으로 여수제일교회에 대한 한국기독교순교사적지 지정 청원도 차기 총회에 올릴 예정이다.

김순배 목사와 김은기 집사
불꽃같은 신앙 끝까지 지켜

순교신앙의 요람 역할을 한 여수제일교회의 예배당 전경.
순교신앙의 요람 역할을 한 여수제일교회의 예배당 전경.

윤형숙 전도사 외에도 여수제일교회에는 뜨거운 신앙과 애국심으로 불꽃같은 인생을 살았던 여러 인물들이 있다.

김순배 목사는 전남 광양 출신으로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여수제일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광주 숭일학교 재학 시절 만세운동에 동참했다가 징역 4개월의 옥고를 치른 경험을 가진 그는 목회자가 되어서도 그 기개를 잃지 않는다.

일제의 신사참배 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며 많은 이들이 굴복하는 상황에서도 성경의 말세론을 일제의 패망에 빗대어 설교하던 김 목사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2년 9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두 번째 옥고를 치른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김순배 목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은기 집사는 한국전쟁 당시 여수제일교회가 배출한 또 한 명의 순교자이다. 함경도 출신인 김 집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외가가 있는 여수로 내려와 여수제일교회에 출석하며 여수YMCA 회장과 여수고등학교 교감 등을 지낸다.

전쟁의 발발은 존경과 신뢰를 받는 그의 인생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필 그 무렵 폐결핵이 발병하여 피난길에도 오르지 못한 채 교회와 집을 오가며 기도생활에 전념하다가, 인민군에 체포된 그는 1950년 8월 어느 날 ‘예수쟁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고 만다.

비극은 그 한 사람으로 그치지 않았다. 함께 체포됐던 외사촌동생은 여섯 발의 총알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생환했지만, 그해 12월 여수제일교회에서 열린 김은기 집사의 추도예배에 참석하고 돌아가던 매부 이판열 집사 가족 그리고 이들과 동행하던 구례읍교회 이선용 목사 등 6명이 빨치산의 습격으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순교신앙 계승 더욱 힘쓸 것” 

인터뷰/ 김성천 목사

자랑스러운 순교사적을 이 시대를 극복하는 순교신앙으로 계승하겠다고 다짐하는 여수제일교회 김성천 목사.
자랑스러운 순교사적을 이 시대를 극복하는 순교신앙으로 계승하겠다고 다짐하는 여수제일교회 김성천 목사.

“113년 전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성도에 의해 시작되어, 민족교회라는 뿌리를 가진 공동체로서 자부심을 간직하며 자라왔습니다. 수많은 선각자들과 헌신된 복음사역자들이 이끌어 온 여수제일교회의 신앙이 두고두고 계승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김성천 목사는 여수제일교회의 가장 큰 자랑을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순교자 윤형숙 전도사와 김은기 집사 외에도, 일제에 항거한 역대 목회자들 그리고 교회당 건축에 앞장서다 순직한 김선영 목사, 광신대학교 전신인 광주신학교 교장을 지낸 박종삼 목사, 교단 총회장으로 섬긴 정성규 목사 등 언급할 인물들이 한둘 아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김 목사와 광신대 김호욱 교수의 공저 <별과 같이 빛나는 생애>(부크크)에 담겨있다.

“이 분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신사참배와 WCC운동 등에 온 몸을 던져 항거하셨고, 목숨 바쳐 순교의 길을 걸어가기도 하셨습니다. 우리가 걸어야 할 길도 바로 이 분들이 앞서가신 발자취를 뒤따르는 것입니다.”

과거 걸인들을 구호하고 순교자 양용근 목사의 유족들을 품으며 주님의 긍휼을 전하는 통로 역할을 감당했던 여수제일교회의 전통은 푸드트럭과 무료급식사업 등으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여수세계엑스포 당시에는 광양만권복음엑스포와 여수기독교총연합회 설립 등을 주도하며 대회 성공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교회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보존하기 위해 역사관 개관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이를 위해 <110년사> 발간 등의 작업과 함께 각종 자료를 수집해왔고, 역대 당회록과 옛 강대상 등의 유물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총회로부터 순교자 등재와 사적지 지정을 받게 되면 이 또한 온 교회에 커다란 영예와 기념이 될 것입니다.”

김성천 목사는 앞으로도 교회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발굴하고 기념하는 일에 힘쓰는 한편, 전도와 기도운동을 통해 건강한 교회의 모델을 만들어가는 사역에도 게으르지 않겠노라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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