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1980년대 유럽에서 처음으로 문화유산관광이 대두할 무렵에는 문화재를 새로운 노다지로 여기고 애지중지 보존하고자 했다. 문화재는 절대 훼손해서는 안 될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었다. 문화유산관광이 전 세계로 확산된 요즘에는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preservationist’s argument)보다는 더 많이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 즉 보존과 활용을 동시에 추구하는 보호론(the conservation paradigm)이 더 큰 힘을 얻고 있다. 따라서 도시 재활성화나 재생은 문화재 또는 문화유산의 재활용으로 귀결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문화재로 등록된 군위성결교회의 과거.
문화재로 등록된 군위성결교회의 과거.

문화재청은 2018년 지역문화재 활용사업으로 ‘생생문화재’ 132선, ‘향교·서원 문화재’ 95선, ‘문화재야행’ 27선, ‘전통산사문화재’ 34선 등 총 290선을 선정했다. 지역에 있는 문화재에 담긴 의미와 가치를 개발하여 지역문화 향유 기회를 늘리고, 지역경제 활성화와 고용창출에 도움을 주기 위한 사업이다. 생생문화재 활용사업은 2008년부터, 향교·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은 2014년부터, 문화재야행은 2016년부터, 전통산사 활용사업은 2017년부터 시작했다.

문화재로 등록된 군위성결교회의 현재.
문화재로 등록된 군위성결교회의 현재.

네 가지 사업 중에서 제일 먼저 시행한 생생문화재 사업은 잠자고 있는 문화재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고 관광자원화해서 문화재가 역사교육의 장이자 대표적인 관광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기획한 사업이다. 말 그대로 ‘문화재 문턱을 낮추고 프로그램 품격을 높여서 온 국민을 행복하게’ 하고자 한 문화유산관광이다. 290가지나 되는 지역문화재 활용사업 중에서 유독 한 가지 사업이 눈에 띈다. 바꿔서 말하면, 기독교 문화재 사업은 290선 사업 중에서 단 하나 밖에 없다는 뜻이다. 한편으로 아쉽고 다른 한편으로 너무나 소중한 기독교 문화재는 등록문화재 제291호 군위성결교회 구 예배당이다.

군위성결교회는 예수교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헤스롭 선교사가 풍금을 팔아서 드린 헌금으로 1920년 10월 15일 창립한 교회다. 1937년 두 번째 예배당인 문화재예배당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담임목사 이종익이 순직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10월 제9대 담임교역자로 최헌이 부임하고, 그 해 12월 17일 헌당한다.

최헌 목사와 성도들은 동방요배를 거부하면서 교회는 두 번째 시련을 겪는다. 1941년 10월 일제는 동네청년들을 교회당에 모을 테니 시국강연을 하라고 요청했다. 최헌 목사는 거절하고 투옥된다. 1941년 12월 최헌 목사는 부흥회에서 <금수강산가> <슬프다 고려반도> <근화동산가> <우승가> 등을 찬양하고 또 다시 체포된다. 일제가 독립사상을 담고 있는 노래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모진 취조와 고문을 당하고 보안법 위반으로 1년 2개월 11일 동안 옥고를 치르다 1943년 2월 25일 석방된다. 그러나 1943년 5월 24일 전국성결교회 교역자 체포령으로 200여 명의 성결교회 교역자들과 함께 다시 옥에 갇힌다.

1943년 12월 29일 일제가 성결교회를 강제해산 하면서 성결교회 교역자들을 기소중지했다. 그러나 최헌 목사만은 계속 옥고를 치른다. 군위성결교회는 일제로부터 제일 먼저 폐쇄되었고, 담임목사 최헌은 일제에 의해 가장 오랫동안 옥에 갇혔다.

고통스럽지만 자랑스러운 신앙은 광복을 맞으면서 다시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쓴다. 제10대 담임 천세광 목사는 양정중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다. 1926년 순종 인산일(국장) 6·10만세운동에 참가하고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다. 1940년 삼천포교회 담임목사로 재임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또 다시 7개월 동안 옥에 갇힌다. 1943년 일제가 성결교회 목회자를 모두 구속할 때 세 번째 옥에 갇힌다. 12월 성결교단을 해산하면서 다른 목회자를 석방할 때에도 천세광 목사는 최헌 목사와 마찬가지로 계속 옥고를 치른다. 1944년 2월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가 1945년 8월 11일 사상예비검속 때 마지막으로 갇힌다. 감옥에서 광복을 맞은 천세광 목사는 고향 군위로 달려간다. 흩어진 성도들을 일일이 찾아 심방하고 9월 5일 해방기념예배를 드린다. 군위군 치안유지위원장으로 광복 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한 독립유공자다. 평생 38개 교회를 개척하고 7만6000명에게 복음을 전한 전도대장으로 살다가 1964년 소천했다.

일제가 교회를 폐쇄하면서 군농회에 2310원을 받고 팔아버린 문화재예배당을 20만원에 되찾은 것은 1956년이다. 전쟁의 상흔마저 간직한 예배당은 지난 2006년 문화재예배당이 된다. 군위성결교회는 생생문화재 사업을 통해 기독교 문화재 해설사를 양성하여 골목길 성지순례를 활성화하고자 한다. 새천년에도 자랑스러운 교회 역사를 계속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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