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신앙문화 원형 귀하게 지켜오다
초기 선교사 활동 이후 철저한 신앙전통 바탕, ‘복음의 땅’ 긍지의 역사 이어가

대한민국 서쪽 끝 섬에는 그 모양이 힘차게 비상하는 학의 하얀 날개깃을 닮았다고 해서 백령도(白翎島)라는 이름이 붙었다. 대청도 소청도 등과 함께 군도를 이루는 이 섬은 중국 쪽에서 한반도로 접근하는 배들의 관문 역할을 했다. 두 세기 전,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아온 선교사들에게도 그랬다.

한국 땅을 가장 먼저 밟은 네덜란드의 귀츨라프 선교사는 1832년 7월, 훗날 대동강에서 순교한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는 1865년 9월에 각각 백령도를 방문한다. 서투른 소통방식에도  이들이 머무는 동안 섬에는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들의 손에 들린 성경이 사람들에게 건네졌다.

중화동마을 입구에서 교회로 이어지는 담장을 장식하는 ‘백령도 믿음의 벽’ 벽화와 사진들.
중화동마을 입구에서 교회로 이어지는 담장을 장식하는 ‘백령도 믿음의 벽’ 벽화와 사진들.

중화동교회(조정헌 목사)는 이처럼 짧지만 강렬했던 역사에 기반을 둔 공동체이다. 섬의 남쪽 중화동마을 산중턱에 우뚝 선 이 교회는 설립된 이래 100년의 시간을 훌쩍 넘기며 백령도 전체를 복음의 땅으로 변화시키는 통로역할을 감당해왔다.

중화동교회 최초의 세례교인이자 23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하기도 한 허간 목사가 기록한 약사에 따르면 교회가 정식으로 설립된 것은 1896년의 일이다.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정쟁에 휘말려 백령도로 유배당한 김성진은 뭍에서 가져온 신약성경을 자신이 머물던 집 주인인 허득에게 전하며 함께 예수를 믿기로 정했다.

백령도 중화동 포구에 세워진 한국기독교복음전래선구지 기념비. 귀츨라프, 토마스, 언더우드, 서경조 등 ‘한국교회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수많은 이들의 발자취가 이 섬에 남아있다.
백령도 중화동 포구에 세워진 한국기독교복음전래선구지 기념비. 귀츨라프, 토마스, 언더우드, 서경조 등 ‘한국교회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수많은 이들의 발자취가 이 섬에 남아있다.

그 해 6월 경 두 사람은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자신들이 예수를 믿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며 동의를 얻었고, 마을 청년 김달삼을 소래교회로 보내 훗날 한국인 최초의 목사 중 한 사람이 되는 서경조 장로와 홍종옥 집사 등을 섬으로 모셔온다. 이들의 집례로 8월 25일 동네 서당에서 중화동교회 설립예배가 열리며 본격적인 백령도 복음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소래교회는 갓 태어난 중화동교회가 자리를 잡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주었다. 서경조 장로 일행은 한 달 가량 섬에 머물면서 마을 사람들이 스스로 예배를 이어갈 수 있도록 기틀을 잡아주었고, 1899년 중화동교회가 첫 초가예배당을 건축할 때도 자신들의 교회당 건축자재 일부를 백령도로 보내주는 등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백령도 기독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백령기독교역사관.
백령도 기독교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주는 백령기독교역사관.

이듬해에는 장로교의 공식적인 첫 한국선교사였던 언더우드(한국명 원두우)가 배로 건너와 허득 최영우 허윤 허간을 비롯한 7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다시 한 해 뒤에는 첫 교역자인 한연일 전도사가 부임하며 중화동교회는 점점 조직을 갖춰간다.

보통 1~2년 길어야 3~4년 단위로 교역자가 바뀌던 강단은 중화동교회 최초의 집사였던 허간 목사가 담임목사로 돌아와 23년간 지키면서 비로소 안정된다. 그 사이 사곶교회를 시작으로 백령도 안에 여러 교회들이 중화동교회로부터 분립 개척됐고, 분단과 전쟁으로 백령도가 군사적 거점이 되면서는 군인들을 위한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물론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 설립 직후 육지로 나갔던 마을사람들이 배가 난파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은 사건으로 교세가 급속히 악화된 일도 있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강력한 탄압으로 교역자조차 없이 위축된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온갖 시련과 변화를 겪으면서도 중화동교회에는 대물림해가며 끝까지 지켜온 신앙의 유산들이 있었다. 오래된 당회록, 낡은 종, 옛 예배당의 상량문처럼 손에 잡히는 유산들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귀한 무형의 자산들이 중화동교회의 역사를 빛나게 한다.

한국교회 신앙문화의 원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중화동교회의 예배당 전경.
한국교회 신앙문화의 원형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중화동교회의 예배당 전경.

“중화동 앞바다에 아무리 고기떼가 가득해도 주일에는 어느 누구도 배를 띄우지 않았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되어서야 비로소 배를 움직이기 시작했죠. 그렇게 하는데도 연말이 되어 결산해보면 번번이 중화동의 수확이 가장 좋은 것으로 나온다고 다들 놀라워했답니다.”

가문 5대에 걸쳐 중화동교회에서 신앙을 이어가는 최의신 장로의 증언처럼 철저한 주일성수문화가 아직 이곳에 살아있다. 어른들부터 아이들까지 아무리 사소한 수입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십일조를 바치는 철저한 헌금문화, 주일에는 마을 전체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예배당에 모여 가장 좋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교회중심의 문화도 여전하다.

마을 복음화가 100% 가까이 유지되어온 비결은 이처럼 성도들의 교회 안에서와 바깥에서 모습이 항상 일치되었던 데도 있다. 무려 123년이란 시간 동안 한 결 같이 흘러온 이러한 모습은 마을 입구에서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길목 담장에 ‘백령도 믿음의 벽’이라는 주제를 단 벽화와 사진들로 남아있다.

마을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 설치된 한국기독교복음전래선구지 기념비와 교회당 뜰 앞에 나란히 놓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세례식 집전 기념비, 중화동교회 설립자인 허득공과 허간 목사의 기념비, 백령도 기독교선교 100주년 기념비, 교회 설립 100주년 기념비 등에는 중화동교회 그리고 백령도 모든 교회들의 긍지를 담고 있다.

중화동교회가 간직한 이러한 신앙적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된 옹진군에서도 2001년 백령기독교역사관을 건립하고, 중화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순례길을 조성하며 그 역사를 기리는데 동참해왔다. 이번에는 총회에서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 지정으로 화답할 차례이다. 조정헌 목사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정중한 초청의 마음을 전국교회에 전한다.

“지금도 우리 교회 성도들은 예배 시작 30분 전이면 이미 모두 교회당에 나와, 함께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맞이합니다. 오래된 교회의 역사보다 이토록 순전하게 지켜온 신앙의 전통이 더욱 귀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백령도로 오세요. 아름다운 한국교회 신앙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의 섬’ 지정 추진
신앙전통 계승 ‘바이블랜드’ 조성 힘써

백령도에는 중화동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1905년 중화동교회로부터 분립 1호 교회로 출발해 기독교 벽화마을로 유명해진 사곶교회, 1906년 설립돼 면소재지에 자리 잡으며 교세를 크게 키운 진촌교회, 1917년 출발해 마을 전체를 복음화하며 100주년을 갓 넘긴 화동교회 등 상당수 교회들이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백령기독교역사관 앞에서 함께 한 인천노회 백령시찰 목회자들.
백령기독교역사관 앞에서 함께 한 인천노회 백령시찰 목회자들.

5년 후면 100살 대열에 합류하는 가을교회, 토마스 선교사가 배를 타고 찾아와 복음을 전하던 아름다운 바닷가에 세워진 두무진교회, 탄탄한 신앙기반으로 무려 23명이나 되는 목회자를 배출한 연지교회 등 교회들마다 지닌 스토리들도 다양하다.

백령도 전체에 세워진 교회가 12개, 그 중 군부대 교회 2곳을 제외한 민간인 교회들은 모두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예장합동) 소속이다. 이들 10개 교회는 이웃한 대청도 소청도의 교회들과 함께 백령시찰을 이루며 인천노회 안에서 꽤 큰 몫을 감당하고 있다.

중화동교회에서 비롯된 신앙적 전통은 중앙교회 장촌교회 등 다른 교회들도 마찬가지로 공유하고 있다. 백령도가 한 때복음화율 90%를 상회했고, 지금도 65%를 넘는 기록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어느 한 교회 뒤처지지 않고 영적으로 늘 깨어 분발하는 노력들이 있었다.

이들 교회는 각기 최선을 다해 사역할 뿐 아니라 서로를 뒷받침하며 하나 됨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매월 한 차례 같은 장소에 모여 연합기도회를 열고, 여름성경학교 청소년수련회 부흥회 같은 행사들도 힘을 합해 개최한다.

역사적으로 기념할만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한마음으로 십시일반 이루어낸 성과들도 적지 않다. 중화동교회 100주년 기념 종탑이, 백령도 교회들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보여주는 백령기독교역사관이, 백령도의 교회 100년사인 ‘선택받은 섬 백령도’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백령도에서 믿음을 키운 사람들의 고향교회 사랑도 눈부시다.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인천노회 원로들인 전응식 박신범 목사는 모교회인 중화동교회 100주년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들 모두는 지금 새로운 소망을 품는다. 바로 섬 안에 백령도한국근현대사기념공원을 조성하는 것이다. 가칭 ‘바이블랜드’라 이름붙인 이 사업이 성사되면 ‘모세의 다리’가 중심이 된 호수공원, ‘진리탐구의 길’이라 불리는 미로공원, 자연산책로인 화훼공원, 백령도의 선교역사를 보여주는 범선공원 등이 설치된다.

이 사업을 주도하는 백령종합사회복지관장 김주성 목사(한사랑교회)는 “바이블랜드는 기독교가 백령도 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널리 알리며, 관람객들에게 또 다른 복음전파의 기회를 만들 것”이라면서 관심과 기도를 당부했다.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박창식 목사)도 최근 백령도를 방문해 답사를 마친 후, 중화동교회를 한국기독교역사사적지로 지정하는 것과 별도로 백령도를 ‘한국기독교의 섬’으로 지정해 달라는 청원을 제104회 총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서쪽 끝 섬 백령도 복음 2세기가 새롭게 밝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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