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하나님이 기대하는 열매는 순종하는 우리 모습입니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겔 2:6)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정명호 목사(서울 혜성교회)

철학, 문학, 종교, 과학, 예술, 생태, 윤리학을 아울러 150여 권의 저작을 남긴 철학자요 문학가인 박이문이라는 원로 철학자는 1999년에 발간한 그의 단행본 <아직 끝나지 않은 길:박이문 에세이>에서 ‘미리 써본 유서’라는 글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는 마음을 이렇게 술회하였습니다.

“추한 것도 많았지만 아름다운 것도 많았지요. 미운 것도 많았지만 예쁜 것도 많았지요. 가난하지만 힘껏 살았소. 짧았지만 오래 살았소. 오래 살았지만 꿈같은 시간이었소. 후회한들 무엇하랴. 힘이 닿는 데까지 살았다오. 이제 아주 나쁜 것도 좋소. 모든 게 좋소. 추한 것도 아름답소. 모든 게 아름답소. 후회도 소망도 없이. 아쉬움도 충만도 없이 그냥 담백하고 맑게 가라앉은 심정으로 모든 것과 조용히 화해한 심정이오.”

이 분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에서는 긍정론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란 없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허무주의자라고 자신을 설명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는 존재하는 것일까요?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일까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살면서 어디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고 계시는지요? 답도 없는 인생살이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인데도 불구하고 세상살이 평균치 정도만 되어도 성공했다고 만족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성경 속의 인물, 에스겔을 통해 이 고민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기 원합니다.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부름 받은 사람

에스겔이라는 사람은 이스라엘 남유다의 제사장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활동하기 훨씬 전 북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이미 멸망당했고, 이제 남유다마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이 시기 바벨론의 통치자는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건축하게 한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입니다. 그는 당시 남유다의 왕이었던 여호야긴과 왕족 및 귀족, 그리고 유다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렘 39:1~10)

나라가 태평성대였다면 에스겔은 종교국가였던 남유다에서 지도력을 발휘할 제사장의 지위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국권을 잃고 치욕스럽게 끌려가는 멸망의 길에서는 일개 포로일 뿐이었습니다. 바벨론으로 향하는 길은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인 이스라엘이 국권을 잃은 국가적 수치였지만, 에스겔 개인에게도 모든 면에서 더이상 내려갈 곳 없는 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는 길이었습니다. 언약의 백성들이 나라를 잃을 위기 앞에서 통곡하며 울부짖어 기도할 때에도 하늘은 응답이 없는 닫힌 하늘이었는데, 이러한 절망의 길에서,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에스겔은 무슨 소망을 품을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포로로 끌려온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언약의 장소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이방 땅의 한 강가에서, 기대하지 않은 때와 장소에서, 기대치 않은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겔 1:1) ‘서른째 해’는 에스겔이 ‘30세가 되던 해’를 의미합니다. 30세는 유대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으로서 역할을 시작하는 공식적인 나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이 사역의 대상인 백성들의 관점에서 제사장이자 선지자의 자격을 갖추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선택하신 사람이 준비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때는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문제이지만, 사람이 준비되는 때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지만 빠른 시간 내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청년 모세를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세가 급한 마음에 그의 백성을 구원코자 서두를 때 그는 실패했을 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아주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는 하나님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준비에 달려 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아무리 분명하여도 우리가 준비될 때까지 하나님은 시간을 끄십니다. 하나님은 만세 전에 선택하시고 계획하셨어도, 우리가 준비되고 세상의 ‘때가 차야’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우리는 내가 다급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원망하지만, 죽은 자도 살리고 망한 나라도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께는 나의 다급함 앞에 오히려 침묵하십니다. 이것이 죽어가는 오라비 나사로로 인해 다급했던 마르다와 마리아와는 달랐던 예수님의 관점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알지 못해 고민하는 ‘하나님의 때’는 사실 ‘우리가 준비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때문에 일을 못하실 수는 있어도, 일이나 상황 때문에 일을 못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상황이나 일 자체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두고 기도하지만, 성령님은 우리가 준비되기를 기도하십니다. 실패로 인한 포로가 됨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나빠지는 상황 때문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해결할 수 없는 힘든 일 때문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어쩌면 하나님은 견디기 힘든 지금의 상황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를 보시며 우리가 준비되기를 기다리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생각지 못한 목적으로 보냄 받은 사람

생각지 못한 때에 부름 받은 에스겔은 하나님에 의하여 특별한 보내심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특별한 보내심의 자리는 제법 폼 나는 자리나 역할이 아니었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겔 2:3)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패역하고 배반하는 백성에게 보내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그를 통해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는 이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시고 보내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겔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에 선지자가 있음을 알지니라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있으며 전갈 가운데에 거주할지라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하지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겔 2:5~7)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지 못한 곳으로 보냄 받은 하나님의 사람 에스겔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직면할 것을 각오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이키기를 원하시지만, 백성들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음을 알리라”(겔 33:32, 33)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으시고 에스겔을 보내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세상에 알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사명의 자리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기대하는 열매가 맺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에스겔처럼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사역의 자리로 부름 받았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평생을 바쳐 죽도록 수고하고 고생했는데 원점에 머물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것마저도 하나님께 울부짖어 극복되기를 기도할 텐데, 시작도 해보기 전에 열매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과연 우리는 그 사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런 면에서 신앙인들에게 결과, 열매, 성취의 여부는 사명의 성공을 가늠하는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이 부름 받고 보냄 받은 목적은 “선지자가 있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가 있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 왜 중요했을까요? 그가 그 자리에서 서서 순종하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대였고 계획이었습니다. 그렇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에스겔의 사명이었습니다. 생각지 못한 때에, 생각지 못한 곳에서 부름 받아, 생각지 못한 곳으로 보냄 받은 에스겔이 ‘순종함’ 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패역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알리는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선지자에게만 주신 사명이겠습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심히 어렵고 패역한 세상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가려는 우리를 격려하기보다는 오히려 어리석다고 말하며 속이려들 지 모릅니다. 그러나 부름 받고 보냄 받은 우리는 순종의 길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기대하는 때에 직접 열매 보기를 강렬히 열망하다가도, 열매 없는 현실 앞에서 좌절하고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열매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심는 자와 물주는 이는 사람일 수 있지만,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을 형통하게 하시는 것보다, 내가 기대하는 결과를 이루게 하시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내 모습을 보여주는 자체가 하나님의 진정한 기쁨이며 열매일 수 있습니다.

사명의 결과가 우리가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라면 성취시키는 능력도 함께 부여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삶 자체가 사명이라면 능력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열매 맺게 하시는 때를 애타게 기다리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순종하는 때를 기다리십니다. 우리는 사명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소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순종 그 자체를 사명으로 보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드러나는 열매를 기대하지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는 순종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많은 열매를 꿈꾸기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꿈꿔야 합니다. 전도의 결과에 연연하기보다 전도하는 삶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숫자적 성장이 아니라 교회의 전도적 방향성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기를 꿈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하나님의 보내심에 충실한 삶,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이러한 관계성 안에서 살아가는 삶,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궁극적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