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길지 않은 생이지만 한 해 한 해 지날수록 성숙하고 발전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낀다. 어제보다 오늘의 생각이 더 깊어지고, 판단력이 더욱 지혜롭게 변화되고, 삶을 실천하는 방식이 더 올바르게 되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이다. 늘 긴장과 갈등을 통해서 성숙해졌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가난이 가난을 낳는 현실에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가난이 가난을 낳는 현실에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간다면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특히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절감한다. 때로 완악하기도 하고 교활하기도 했다. 때로는 어리석고 미련하게 생각하고 결정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세상의 이데올로기에 전염된 생각을 발견하기도 하고, 세속적인 풍속에 쉽게 젖어든 삶의 습관을 보기도 했다. 명백히 잘못임을 알면서도 전통이요, 관행이라 변명하며 고칠 생각을 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옥수동에서 목회를 하면서 그러한 나의 부족함과 미성숙함을 여실히 발견했다.

달동네 주민들을 만날 때면 가슴 아플 때도 많지만 속상할 때도 많았다. 혼자 살거나 내외가 함께 사는 어르신 중에 상당수는 자식들 때문에 도리어 손해를 본다. 자식이라도 없으면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로 분류되어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자식이 있어 지원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부모를 자주 찾아보고 돌보는 것도 아니다. 결과적으로 돈도 없고, 정부 지원도 못 받고, 돌봐줄 자식도 없이 혼자 방치되는 것이다.

어떤 집은 어르신 내외가 사는데,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종일 누워 지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 집에는 자식이 일곱 명이라 정부 지원은 일절 없었다. 그렇지만 어느 자식 하나 부모를 찾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런 사연을 들을 때면 화가 치밀고 눈물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자식이 돼서 이렇게 부모를 내팽개칠 수 있나 싶었다.

그러나 한쪽면만 본 것이다. 자식들을 만나 사연을 들어보면 피치 못할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도리어 자식들이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부모를 돌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불효자식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오히려 부자들보다 더 많이 부모를 염려하지만 생활이 궁핍해서 돌아보지 못할 뿐이다.

고독사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집에서 자라 많이 배우지 못한 자녀들은 많은 경우 육체노동으로 돈을 번다. 하루 종일 노동을 하고 밤늦게 돌아오면 마음이 있어도 실제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쉽지 않다. 피곤한 몸으로 겨우 저녁을 먹고 자기도 바쁜데 어떻게 매일 전화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보면 며칠 연락이 미뤄지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몰랐을 뿐이다. 부모가 미워서 돌아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고된 생활 때문에 돌아보지 못한 것이다. 처음부터 불효막심한 자식이 아니다. 만나면 모두 따뜻한 사람들이다.

찾아오는 자녀 없는 부모들이나, 부모를 찾지 못하는 자녀들이나 모든 가난이 죄일 뿐이다. 가난이 가난을 낳는 우리 사회 현실이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나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만날수록 예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된다. 예수님은 병들고 약한 자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다. 예수님이 약한 자를 위해 오셨다면 우리 역시 약한 자들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주님께서는 우리의 고통을 위해 찾아 오셨고, 지금도 함께 하신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위로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생명의 역사, 진리의 역사, 풍요의 역사가 이 땅에 일어나게 되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께서 친히 이 땅에 오셨다.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위로를 받는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감사이자 기쁨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죄악에 억눌린 사람들, 질병에 고통 받는 사람들, 수많은 정치적 사회적 억압에 위협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그들에게 기쁨이 되어 주어야 한다. 나로 인해 내 주위가, 내 가정이, 이 세상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모른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소원하고 계신다. ‘작은이들의 벗’이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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