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1990년대 ‘서울의 달’이라는 TV 드라마가 있었다. 충청도에서 상경한 20대 춘섭이와 홍식이가 옥수동 달동네로 이사 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제법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 ‘서울의 달’의 한 장면.
드라마 ‘서울의 달’의 한 장면.

‘서울의 달’은 다른 드라마와 달랐다. 당시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부자 동네를 배경으로 하고, 등장인물도 많이 배우고 가진 것이 많은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달동네에 사는 가난하고 억척스런 사람들이 주인공이었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한 순진한 총각, 노처녀 경리사원, 이혼한 술집 주인, 늙은 춤꾼 등이 등장인물이었다.

서울 변두리 소외 계층이 울고 웃는 이야기에 같은 형편으로 살아가는 많은 시청자들 역시 함께 울고 웃었다. 특별히 옥수동 주민들은 ‘서울의 달’이 방영될 때면 열일을 제쳐 놓고 TV 앞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몇 년 전 이 옥수동에 다시 ‘서울의 달’처럼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났다. 2015년 5월 초였다. 우유배달을 후원하던 ‘배달의 민족’ 김봉진 집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며칠 후 투자회사 관계자와 함께 교회를 방문하겠으니 시간을 비워달라는 전화였다.

“요즘 사업이 잘 되나 봐? 투자 회사 어디?” “골드만삭스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신문에서나 보던 세계적인 투자회사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김 집사가 낯설게 느껴졌다. “골드만삭스가 우리 교회는 왜?” “그냥 우리 회사가 교회에 후원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겸사겸사 목사님 한번 뵙고 싶대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2014년에 골드만삭스가 김 집사 회사에 거액을 투자하는 과정에서 김 집사가 매월 500만원씩 우리 교회 우유배달에 후원금을 전달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실제 후원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 차 방문하는 자리였다. 약속한 날이 되어 골드만삭스 상무이사 2명은 우리를 교회를 찾아 왔다.

40대 초반의 이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냉철하고 스마트한 전형적인 엘리트 같았다. 상무이사는 ‘김 집사 회사에서 언제부터 후원을 했나? 후원은 제 때에 잘 들어오고 있는지?’ 등 그간의 과정을 하나하나씩 물어 봤고, 나는 있는 그대로를 담담하게 답했다. 지금은 재개발이 됐지만 옥수동과 금호동이 얼마나 가난한 동네였으며 우리 교회가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외롭고 힘든 독거노인들을 위해 우유배달을 10년째 해 오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가난한 교인, 가난한 이웃들을 이야기할 때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그날도 어느 순간 눈시울이 붉어졌다. 처음에는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던 상무이사는 어느 순간부터 아무 말도 않고 내 이야기만 듣고 있었다.

며칠 후 김 집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목사님! 골드만삭스가 후원을 할 것 같아요.” “골드만삭스가 후원을?” “우유배달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나 봐요. 아무 데나 후원하는 회사가 아닌데 이번에는 좀 특별한 것 같아요.” 김 집사는 자신이 후원을 받게 된 것처럼 기뻐했다. 그러면서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니까 기도하면서 기다려 봐요”라고 했다.

3개월 후 골드만삭스 상무이사가 다시 교회를 찾았다. 김 집사의 이야기대로 상무이사는 지난 번 나를 만난 후 아시아에서 근무하는 이사 15명이 후원금을 모으기로 했다고 전했다. 그들이 약속한 후원금은 기대 이상으로 큰 액수였다. 2016년부터 우유배달을 서울 시내 6개 구로 확대할 수 있었던 데에는, 골드만삭스의 후원이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골드만삭스는 세계적인 투자 회사답게 후원하는 과정에서 요구하는 것도 많았다. 우리 교회가 어느 교단에 속하는지? 우리가 후원한다면 어떻게 쓸 것인지? 교회가 만일 문을 닫는다면 후원금의 남은 돈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등을 물었고 서류도 요구했다. 주고받은 이메일만 수십 통에 달했고, 예산계획서와 약정서 등 영어로 작성해야 하는 서류도 수십 장이었다.

나는 골드만삭스가 요구하는 서류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작성해서 보냈다. 신경도 많이 쓰이고 작업량도 많았다. 하지만 우유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배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들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교회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우셨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고, 지금 한국교회는 더욱 그렇다. 세상의 본이 되고 사회를 견인해야 할 교회가 도리어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과 걱정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나는 거액의 후원금을 받은 것도 좋았지만, 골드만삭스라는 세계적인 회사가 우리 교회에서 시작한 우유배달에 참여하게 된 것을 더욱 뜻깊게 생각한다. 미약하지만 세상을 살 맛나게 하고 빛을 비추는 교회로 보인 것 같아 감사하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교회가 너무 높아지고 부유해졌기 때문이다.

언젠가 골드만삭스 상무이사가 나에게 “목사님은 다른 분들과 다르게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심정을 잘 아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칭찬이었지만 부끄러웠다. 목사라면 마땅히 들어야 할 이야기를 칭찬으로 듣는 것이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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