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경건한 본문 읽기로 거룩한 묵상의 바다에 빠져라

성령이 말씀할 기회를 주석이나 설교집에 빼앗기지 말아야 … 성령의 조명 기대하며 바른 적용 찾아야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중국 선교지에서 많은 젊은이들을 가르칠 때 일입니다. 어떤 학생으로부터 부탁받은 적이 있습니다. 북한에서 건너 온 중학생이었는데, 성경을 많이 읽었지만 예수님을 잘 모른다고 복음을 전해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10대 아이가 신약성경을 거의 암송할 정도였고, 구약도 암송할 계획이라는 말에 선교를 위해 들어간 제가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창세기부터 펼쳐놓고 1절씩 중요한 구절을 중심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 전체의 주제를 보여주고 예수님을 가르칠 생각이었습니다. 먼저 창세기 3장 15절을 읽을 때였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구절에서 여자의 후손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물었더니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성경을 반복해서 읽다 보니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놀라움을 넘어 감탄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성경으로 성경을 이해한다는 말이나, 성경의 최고 선생은 성령이라는 말이 증명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은 읽기만 해도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일반 백성들이 들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을 기록하셨고, 그 말씀은 2000년 전이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물론 2000년이라는 시간의 간격과 청중이 처한 상황의 변화는 엄청납니다. 하지만 거의 모든 말씀은 그냥 읽어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문자란, 기록되었을 때 서로 간에 이해가능한 공유적 성격을 지닙니다. 언어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보편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읽기만 해도 이해가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성경을 대할 때 의미가 파악이 안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해도 그렇게 믿고 순종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필자는 본문 묵상이 설교 준비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것이 설교자의 영성과 직결되고, 본문과 설교자의 만남을 갖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설교자는 강단에 설 때 마음가짐이 다르고 자세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한 사람이 느끼는 확신으로 넘칩니다. 경건한 본문 묵상을 위한 6가지 자세를 나누고자 합니다.

1. 다른 성경보조도구를 먼저 읽지 말라
본문을 묵상하는 것은 선택한 본문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먼저 피해야 할 일은 본문을 충분히 읽기 전에 주석이나 설교집을 보는 일입니다. 참고도구는 읽을수록 좋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본문 앞에 깊이 침잠해 들어가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 프래드 크래독은 “이제는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하고, 질문 할 때이다”라고 강조합니다.

말씀을 직접 만나기 전에 주석 책을 먼저 보는 것을 지양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주석서나 설교집을 먼저 읽게 되면 나의 생각이 지배당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기보다 우리의 생각이 이미 고착될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 경건한 묵상을 통해 나에게 주어진 말씀을 발견할 때 누리는 감격이 있습니다. 똑같은 본문이라도 다른 사람의 연구에서 얻는 통찰력과 자신이 스스로 확인하고 깨달은 감격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 감격을 누리기 원하는 설교자는 거룩한 묵상의 바다에 빠져야 합니다. 말씀 앞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모습, 나에게 비춰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바라본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신과 담대함 속에 하늘의 음성을 전할 수 있습니다.

셋째, 경건한 읽기를 통해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하는 것은 경건한 읽기가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나에게 들려주시는 기회를 주석서나 설교집을 먼저 읽음으로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신앙인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오늘날 나의 지성과 영성을 통로삼아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진리를 흘려보내시고 들려주시기를 원하십니다.

2. 사랑하는 연인의 편지처럼 읽어라
학창시절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첫 편지를 읽을 때의 기분을 기억할 것입니다. 편지 봉투에 기다리던 사람의 이름이 적힌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설렙니다. 읽고 또 읽어 외울 정도로 읽어도 여전히 반가운 편지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도 사랑하는 연인의 편지와 같은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사랑의 편지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친히 보내신 편지라면 어찌 떨리는 가슴 없이 읽을 수 있겠습니까? 구절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이 스쳐오고 문장을 대할 때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전달되고 그 향기가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편지를 읽을 때는 사전이나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대학원에서 영시를 공부할 때 깊은 고민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신앙의 친구가 예수님이 양떼를 먹이는 그림이 나오는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는 첫 구절에 다른 말씀은 더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된다 해도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가슴에 새겨졌을 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3.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발견하라
본문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끊임없이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본문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는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가슴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을 때 의미의 결정 주체가 누군가에 따라 세 가지의 해석학적 시각이 있습니다. 저자의 의도를 중심으로 읽을 것인지, 저자는 무시하고 본문이 말하는 것을 읽을 것인지, 아니면 독자 입장에서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면서 읽을 것인지 말입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본래 저자가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비평학의 등장으로 기존의 저자와 본문을 중심으로 하는 해석은 점점 독자중심의 해석학으로 바뀌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사람들은 성경의 진정한 저자가 성령이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을 바르게 깨닫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읽고 해가 지는 시간을 연구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씀 앞에 태초의 시간을 연구하는 것은 이 말씀을 주신 목적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 경배하며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인 성령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를 깨달아야 말씀을 바르게 이해한 것입니다.

4.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어라
성경을 읽는 1차적 이유는 구원을 얻고, 믿음을 얻고, 예수님을 더 잘 알기 위해서입니다.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성경을 읽는 이유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 해도 단지 인식을 위해 읽는 것과 그 말씀 앞에 순종하고 반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읽는 것은 마치 머리와 가슴과의 거리와도 같습니다. 전자가 ‘머리 읽기’라면 후자는 ‘가슴 읽기’가 될 것입니다.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본문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해하기 위해서 읽을 뿐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 읽게 될 것입니다. 특히 설교자들은 설교 준비를 위해 성경을 읽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내가 먼저 말씀 앞에 단독자로 서서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로 읽어야 합니다. 온 회중을 변화시키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시작입니다.

5.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적용을 찾으라
본문에서 적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묵상하면 설교의 목적을 잘 드러낼 수 있습니다. 설교자에게는 두 가지 사명이 부여됩니다.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과 그 말씀을 회중에게 바르게 적용하는 일입니다.

이를 위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는 해석학적 안목과 시대와 청중을 바르게 이해하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는 것은 설교의 기본 목적에서 벗어나는 일이고, 청중의 삶과 분리된 설교 역시 허공을 치는 설교가 됩니다. 본문의 의미는 언제나 동일하지만 시대와 청중에 따라 적용은 여러 방향으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파악하는 열심만큼 청중을 이해하고 오늘의 삶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관심도 필요합니다. 설교자란 본문과 청중을 동시에 해석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입니다.

본문 해석은 문자와 배경, 성경전체 시각으로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지만, 적용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가능합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말씀이 나올 때마다 이 말씀이 청중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지를 염두에 두고 묵상한다면 설교가 지향하는 방향을 분명하게 할 수 있습니다.

6. 성령의 조명을 기대하며 읽어라
경건한 읽기에서 설교자가 의지해야 할 가장 중요한 분은 성령님입니다. 일반 문학은 저자, 언어,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으면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는 근본적으로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진정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사전과 주석에 의존하려 합니다. 진실로 주님의 영을 믿고 의존하는 사람은 “나의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법을 보게 하소서”라고 간구하게 됩니다.

어떻게 성령의 조명을 받을 수 있을까요? 첫째,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진정으로 말씀을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고 묵상이 깊을지라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한 학생이 고민을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경해석을 위해서는 성령이 아니라 사전이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데 혼란스럽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이해한 것을 두고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바르게 깨닫는 것은 문자 이해를 넘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둘째, 성령의 조명을 기대하는 설교자는 절대적으로 성령께 의존하며 기도하게 됩니다. 자신에게서 나오는 최고의 지혜로움이 하나님의 어리석음만 못하다는 사실을 진실로 아는 사람은 성령의 조명을 위해 간절하게 간구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설교의 과정이 기도의 결실이 되는 것입니다.

묵상이 깊어야 설교가 살아난다
경건하게 묵상하는 일은 긴 시간을 요구하는 자기와의 끊임없는 싸움입니다. 주석서나 다른 사람의 설교에 의존하는 설교자에게는 본문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낭비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그 말씀이 나에게 먼저 설교되기를 원하는 설교자라면 말씀과의 만남의 시간을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건한 묵상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설교자 자신에게 설교하는 시간입니다. 설교자에게는 말씀을 통해 먼저 하나님을 체험하는 시간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마음을 향하여 설교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설교를 잘 할 수 없다”는 존 오웬의 말은 깊이 새길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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