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하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 모든 것을 더해 주시는 분이시다.(마6:33) 나는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는 가운데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생히 체험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겨울이 가장 힘든 계절이다. 막노동을 비롯한 일용직 일거리가 줄어들고, 어르신들은 폐지를 줍기조차 힘들어진다. 일거리가 없어지다 보면 자연히 몸과 마음이 움츠러든다. 12월에는 더욱 그렇다. 이렇게 한 해가 지나가는구나 싶고 허무함을 많이 느끼게 마련이다.

몇 년 전이었다. 나는 성탄절이 가까워 오면서 이웃들에게 작은 선물이라도 전하고 싶었지만 고정적으로 해 오던 사랑의 쌀 나누기를 불과 얼마 전 추수감사절에 이미 했던 터라 재정이 여의치 않았다. 기도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새벽마다 이웃들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겨울을 보낼 수 있도록 돕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하기를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목사님! 저 기억하시겠어요? 옥인교회 정은일 집사입니다.” 전에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청년부를 맡아 사역할 당시 부장집사님이었다. “안녕하세요? 집사님! 어쩐 일이세요?” “신문에서 목사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저도 조금이나마 동참하고 싶어서요.”

나는 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다.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신실하게 나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 집사님은 그 날 오후 300만원을 보내왔다. 나는 이웃들을 위해 무엇을 나눌까 고민하다가 연말연시라는데 착안해 그 돈으로 쌀 열 가마니를 사서 떡국 떡을 만들었다. 3kg씩 300가정에 돌아갈 떡이 만들어졌다. 갓 뽑아낸 떡을 이웃들에게 나눌 때에는 내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그 떡국 떡을 먹고 나이도 한 살 더 먹었다.

참된 구제는 경쟁이나 강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나누고 사랑하는 것이 구제의 진정한 모습이다.
참된 구제는 경쟁이나 강요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나누고 사랑하는 것이 구제의 진정한 모습이다.

이제 장로가 되신 그 집사님은 벌써 10년이 지난 지금도 12월 성탄의 계절이 되면 잊지 않고 어김없이 300만원을 보내온다. 자신들의 애써 번 돈을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분들을 지켜보며 구제란 어떤 것인지를 조금씩 더 배워가고 있다. 또한 구제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아야 더 바르게, 적극적으로 구현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사람들 중에는 교회의 구제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드러내고 생색내기 위해 구제를 한다고 오해한다. 어떤 이들은 구제를 마치 교회끼리 경쟁을 벌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구제는 생색내기도, 경쟁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해야 하고, 더불어 지켜가야 할 하나님의 명령일 따름이다.

구제가 교회 간 경쟁이라면 바다 건너 노부부들이, 옛 교회 청년부 부장 집사가 우리 교회에 헌금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다른 교회를 섬기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데 네 교회 내 교회가 따로 없다는 생각으로 헌금을 보내오는 것이다.

구제를 정치 사회적인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분배정의 차원에서 구제를 이해한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갈등의 벽이 심각한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생각할 때 분배 정의는 설득력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적인 개념에서 볼 때 구제에는 ‘분배’라는 말보다는 ‘나눔’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우리 교회가 하는 구제 역시 분배가 아니라 나눔이다. 모든 것을 공정하게 나누고, 골고루 모든 사람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배려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이러한 분배정의가 자발적이 아니라 물리적이거나 강압적으로 이루어질 때 본래의 정신은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분배정의는 그것을 최상의 목표로 생각하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못 가진 자들을 향한 성경의 해답은 분배가 아니라 나눔이다. 사도행전 2:43~45절에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며”라고 말씀한다. 인류 역사상 자기 소유와 물건을 자진해서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기쁨으로 나누어 준 사건은 이 일이 처음일지 모른다. 이는 바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처럼 초대교회는 나눔 공동체이었으며, 이 공동체를 원형으로 하여 형성된 것이 오늘날의 건강한 교회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주체로 존재하면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한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세상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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