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인화 권사(The1904 대표·전 광주광역시 의원)

홍인화 권사(The1904 대표·전 광주광역시 의원)
홍인화 권사(The1904 대표·전 광주광역시 의원)

올해로 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을 맞이했다. 5·18 당시 광주 기독교계와 기독인들의 모습에 대한 정확한 고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누군가 교회가 5·18민주화운동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 했느냐고 묻는다면 ‘광주의 거의 모든 교회가 기도하고, 설교를 통해 의사표명을 하면서 꾸준히 개입했다’라고 답하겠다.

계엄군이 진입하던 그 날 새벽 잠들어 있던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일어나 목숨을 던지는 항쟁에 참여했다. 그 중에는 물론 기독교인들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살아가던 조국과 시대를 위해 역사적 책무를 다한 것이다.
당시 광주기독병원에는 헌트리(Charles Betts Huntley·한국명 허철선) 선교사가 원목을 맡고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들고 현장의 끔찍한 광경들을 사진으로 찍고, 기자 출신이었던 그의 아내 허마르다는 글을 써서 급박했던 광주 상황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섰다.

또한 그 시절 광주의 교회들은 ‘광주시기독교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며 자신들의 몫을 감당했다. 이 단체는 ‘기독교비상구호위원회’로 개칭하면서 광주 4대 병원에 수용된 부상자 치료와 중상자 위문에 앞장서고, 교도소를 위로 방문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희생자들의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기독교계는 당시 계엄사와 협상 역할도 맡았다. 1980년 5월 18일의 사건이 벌어지고, 5월 29일 처음으로 집단장례가 치러지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폭도라 오해받는 일도 겪고, 목관을 직접 제작해 시신 수습에 나서야 하는 열악한 상황에서도 기독교인들은 묵묵히 역할을 수행했다.

망월동에 묘역을 조성하는 과정에서도 유족들은 5·18 희생자들만의 집단묘역 조성을, 광주시에서는 누구든 들어올 수 있는 일반묘역 조성을 각각 주장해 충돌이 일어났다. 이 때 교계지도자들이었던 방철호 목사와 명노근 장로 등이 나서 유족의 뜻을 강력하게 대변해 관철시켰다. 오늘날 국립5·18민주묘지가 존재하게 한 숨은 공로자들이다.

1981년에는 ‘유족부상자돕기위원회’가 꾸려졌다. 이들은 호남신학대학교 지하실에서 비상기도회를 열며 5·18에 대한 증언, 진실을 알리는 일을 했다. 1주년을 맞아 앞서 언급한 헌트리 선교사로부터 전달받은 사진들로 ‘오월 사진전’도 기획했다. 결국 광주에서는 열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전주 한일장신대에서 전시회를 개최한 일이 있다.

이밖에도 조직적이지 않은 개별적 활동들이 기독교인들에게서 꽤 많이 이루어졌다. 당시 교계에는 평화적인 행동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고, 구속자 석방 등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강경파들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저항해야 한다는 마음은 한결 같았다. 이를 계기로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초교파적인 모임인 광주시기독교교단협의회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조직된다.

매년 5월 18일 오후 2시가 되면 계엄군과 시민들이 치열한 대결을 벌였던 현장 중 하나인 광주역 부근 한빛교회에서 추모예배가 열린다. 1981년 ‘전남도민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문서를 발표하며, 이듬해 첫 예배를 시작한 후 금년으로 38년째 추모예배가 계속되고 있다. 올해에는 기념예배와 함께 평화콘서트를 함께 개최했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시대와 상황 속에서 하나님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지 교회는 푯대가 되어주어야 한다. 5·18은 교회가 예언자적 사명을 각성하고 배우며 새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하나하나 감춰져있던 사실들을 들춰내고,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며 널리 알리는 역할들을 교회가 계속 감당해나가기를 기대한다. 또한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민주적인 사회로 발전시키기 위해 교회가 시대적 사명에 부응하는 노력도 더욱 기울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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