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근 목사(남부전원교회)

박춘근 목사(남부전원교회)
박춘근 목사(남부전원교회)

제103회기 총회 기치는 ‘변화’이다. 제56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도 연장선상에서 ‘일어나 함께 희망으로!’라는 주제로 회복과 변화를 기도했다. 금번 목사장로기도회는 과거에 발목 잡혀 살지 말 것과 미래를 열어주실 분을 제대로 만나 우리가 처한 현재를 넘어서자는 희망을 선포하는 자리였다. 또한 우리 교단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를 견인해 가는 시대적 사명과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주옥같은 메시지들로 기도회에 참석한 자신과 교회 회복을 위한 절박한 간구와 호소가 가득했다.

4차 산업혁명시대에 한국교회는 심각한 도전에 놓여 있다. 1차 산업혁명이 영국 중심으로 시작되어 자동화를 거쳐서 사물인터넷과 빅 데이터, 인공지능이 주도하는 4차 산업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변화의 속도가 이전보다 매우 빠르므로 더 부담스럽고 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교회의 다음세대는 감소 내지 둔화되고 있는 현실 앞에 변화가 빠른 시대마저 도래하였다는 소식은 가일층 교회의 부담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는 내부적으로 복음진리를 지키기 위한 여러 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기복주의, 성장주의, 신비주의, 물량주의의 침투를 막아야하며, 각종 이단과 거짓복음에 대해서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한다. 또한 내면 변화와 거룩함을 향한 성숙에 지속적으로 힘을 쏟아 부어야 한다.

외적으로는 맹렬하고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사회의 공격을 받고 있다. 2002년을 기점으로 ‘개독’과 같은 비하 호칭이 유통되더니 이제는 일반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최악의 배우자로 ‘교회 다니는 오빠’라는 소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부분적인 약점과 허물이 교회의 전체적인 이미지로 각인되는 상황이 되었고, 젊은 주류는 기독교를 정의롭지 못한 그룹 중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급변하는 시대와 상황에서 내적 성숙과 외적 복음의 확장을 모두 이루어 내야하는 두 가지 사명이 생겼다.

이러한 사명을 개인적 혹은 개 교회별로 기도할 수 있겠지만 ‘함께’라는 공동체적 사명인식과 ‘우리’라는 융합적인 목표를 가지고 총회가 공개적으로 모여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가지게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따라서 기도회는 도전과 역동적인 시대 앞에 교회가 위기를 넘어설 수 있도록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고 묻는 3일간의 목사장로기도회 시간이었다.

유선과 무선이 연결되고 데이터 통신과 이동통신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연결되는 시대이다. 이처럼 다양한 요구에 응할 수 있고 탄력적이고 융합적인 해법을 제공하는 것을 제4차 산업에서는 ‘플랫폼’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그 시기도 우리가 처한 시대적 상황처럼 변화와 소용돌이 시대였다. 하지만 주님은 이를 반전의 기회로 삼으셨다. 육체와 영적인 질병자도, 삶의 방향과 마음의 중심이 잘못되고 인격이 병든 사람도 주님은 다 온전케 하셨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은 시대의 모든 것을 융합하는 가장 강력한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의해 세워진 한국교회 또한 당연히 시대적 플랫폼이 되어야 하고 반전을 이루어 내야 할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복음전파와 사역은 이전과 다른 탄력성과 적응력을 가질 필요가 있다. 사회 문제와 개인 문제가 복잡하고 다양한 요구들이 존재한다. 탁아문제는 얼마나 많은 가정들의 고민거리인가? 학교폭력문제, 청년들의 취업문제, 직장인들의 52시간 근무로 인한 여가활용문제, 중년들의 조기은퇴문제, 노후불안문제, 노년들의 복지문제, 치매의 폭발적인 증가문제를 비롯하여 도시에는 도시문제가 있고 농촌에는 농촌의 문제가 산적해 있다. 바다에는 몰려온 중국 어선들의 문제가 있다. 이러한 문제로 가득한 세상에서 한국교회는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섬기는 융합의 통로 같은 플랫폼의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시대적 사명이다.

그러면 어떻게 플랫폼의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세상이 절대로 따라할 수 없는 탁월한 경쟁력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희생과 십자가의 고귀한 사랑이다. 이를 세상 어느 곳에서 따라할 수 있겠는가? 세상 사람은 아무리 재미가 있어도 자기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는다. 세상은 아무리 화려해도 자기를 낮추고 종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이 같은 섬김과 낮아짐의 융합으로 반 기독교적 정서는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이고, 교회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녹아내리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사장로기도회가 희망을 노래하고 갈망으로만 끝난다면 아무런 의미도 변화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기도하는 시간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변화를 받아 거짓과 범죄에서 벗어나고 자기를 부인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성육하신 예수님처럼 자기희생과 종의 도를 행하는 헌신의 참된 기도자로 세워지자. 우리의 현실상황이 얼마나 비관적이고 비참하면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기도회의 주제가 되었는가를 깊이 성찰해야만 한다. 금번 기도회 장소마저도 겨자씨교회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작은 기도의 몸부림으로 큰 나무를 이루고 새들이 깃드는 이 시대의 교회와 총회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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