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관광경영학과 교수〉

인천개항장 내리교회 뒤편 언덕에 성공회 내동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1956년 성당을 짓고 이곳으로 이사 왔다. 내동성당이 이사 오기 전에는 병원이 있었다. 1904년 러일전쟁 서막을 열었던 제물포해전에서 부상자를 후송하여 치료한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다.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 병원을 성누가병원(St. Luke Hospital and Dispensary)이라고 불렀다. 성 누가의 날에 개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91년 10월 이곳에 병원을 열었던 성공회 의료선교사 랜디스(Elis Barr Landis, 1865~1898)는 낙선시의원이라 불렀다. 성누가병원이라는 이름은 조선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행을 베풀어 기쁨을 누리는 병원’이라는 뜻으로 낙선시라는 간판을 달고 병원 벽에는 조선 그림과 글씨를 걸었다. 랜디스는 모든 관심이 조선 그리고 조선인이었다. 제물포 사람들은 랜디스를 ‘약대인’(藥大人)이라 불렀고, 병원이 자리한 언덕을 ‘약대인 산’이라 불렀다. 제물포 사람들은 랜디스 박사를 그렇게 존경했다.

의료선교사 랜디스 박사가 환자들을 치료했던 인천 낙선시의원은 현재 성공회 내동성당 자리가 되었다.
의료선교사 랜디스 박사가 환자들을 치료했던 인천 낙선시의원은 현재 성공회 내동성당 자리가 되었다.

랜디스는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랭카스터에서 태어났다. 1888년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랭카스터 카운티 병원에서 의사 생활을 시작한다. 1890년 뉴욕 올 세인트 재활병원 의사로 자리를 옮겨서 일하던 중 영국 성공회 코프(Charles John Corfe, 1843~1921) 주교를 만난다. 주교는 서품을 받고 조선 선교에 나서기 직전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아 조선에서 캐나다를 거쳐 미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1890년 9월 29일 랜디스 박사는 코프 주교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한다. 1891년 10월 조선지계(朝鮮地界) 그러니까 조선인마을에 병원을 완공하고 본격적인 진료에 들어간다. 현재 내동성당이 있는 자리다. 대부분 조선환자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진료비와 치료비를 받지 않았다.

랜디스 박사는 1892년 이래로 조선고아학교를 개설해서 가르치는 한편 조선 고아 중 한 명을 입양해서 키운다. 같이 생활하는 고아 숫자는 순식간에 다섯으로 불었다.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모든 그리스도인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사용하고자 했던 메노나이트의 신앙을 실천했다.

1895년 크리스마스 때 유럽과 미국으로 안식년 휴가를 떠나지만 1896년 5월 다섯 달 만에 제물포로 돌아온다. 두고 온 고아들 때문에 서둘러 귀국한 것이다. 1897년 여름 외국인조계에서 가까운 조선지계에 새로운 거처를 정하고 다섯 명의 고아와 함께 생활한다. 한편으로 고아를 돌보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 가장 조선적인 환경에서 조선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조선 고아들에게 가장 편안하게 생활할 수 있는 곳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조선인들이 모여 사는 조선지계다. 조선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가장 적절한 연구 장소 역시 조선지계다. 그러나 1898년 4월 16일 갑자기 몸져눕는다. 발병한지 3주 만에 유명을 달리한다. 논농사를 짓던 곳과 가까운 저지대에 살다가 말라리아에 감염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임종을 지켰던 트롤로프 주교에게 한 가지 부탁을 남긴다. 자신이 연구한 조선 관련 논문과 각종 도서를 처분해 달라는 것이다. 트롤로프 주교는 랜디스 박사가 소장한 도서를 성공회 명의로 일괄 구매한다. ‘랜디스 기념 문고’(Landis Memorial Library)를 만들어서 조선 관련 도서를 보관하고, 일부 논문을 출판한다. 랜디스 박사의 전체 저술을 언젠가 단행본으로 엮어서 출판하기를 희망하면서 1900년 영국성서공회 왕립아시아학회 한국지부를 창설하고 설치한 도서관에 1903년 랜디스 기념 문고를 대여한다. 1941년 일제가 선교사를 추방할 때 조선을 떠나야만 했던 트롤로프는 랜디스 문고를 연희대학교에 위탁한다.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서 보관 중이다. 당시 랜디스 문고는 서양어로 저술한 한국학 문고 중 가장 포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조선을 사랑했던 의료선교사가 한국학(Korean Studies)을 개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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