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선수가 만나는 가장 불행한 경우는 무엇일까? 월드컵 결승 좌절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가장 설득력을 갖는 것은 올림픽에서 4위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금과 은 그리고 동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서 국기를 휘날리는 영광을 누리는 선수는 오직 3위까지다. 그런 가운데 잊히는 4위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

4위를 한다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실력인가. 시간을 다투는 기록경기의 경우 1등과 불과 1초 차이도 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럼에도 4위 이기에 시상대에서 박수 받는 선수들을 바라보며 쓸쓸히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은메달을 목에 건 2위 선수보다 동메달의 3위 선수가 훨씬 행복하다고도 한다. “하마터면 이 자리에 설 수 없었을 텐데 3등한 것이 다행이다”는 생각 때문이다. 은메달리스트의 경우 “조금만 더 잘했으면 금메달이었는데”라는 아쉬움 때문에 동메달보다 불행하다는 심리학적 분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행복과 불행은 항상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내가 올림픽에서 4등한 선수’라고 말하지 않는 한 기억에서 사라지는 세상을 살다보니, 죽어라고 1등을 지향한다. 1등을 꿈꿔야 3등이라도 한다는 논리도 먹히는 실정이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최고만 지향하느라 지쳐간다. 전교 1등을 놓친 것 때문에 자살을 하는 학생이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시상대에 서야만 주목받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이 나은 결과가 아닐까.

교회는 좀 나아야 할 텐데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 ‘빅 쓰리(Big three)’라 할 수 있는 세 명의 제자,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에게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4등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박수를 보내는 세상, 그래서 꼴찌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할 교회조차 세상 흉내내기에 바빠 보이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물론 아직도 일부 교회와 목회자들이 교회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곳곳에서 열심히 피땀 흘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서열화된 세상에서 그들은 4위도 아니고 400위 밖에 밀려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들의 시선은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하늘에서는 그렇지 않겠지만 1등에만 목을 매는 이 땅에서는 그들의 눈물과 겨자씨 같은 생명력이 묻히고 있는 것 같아 참 안타깝다.

지금쯤 광주광역시의 겨자씨교회에서 함께 어우러져 기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무엇을 구하고 있을까? 거기 앉아 여전히 일등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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