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고난 함께한 교회만이 지도력 발휘”
정흥렬 교수 “3·1운동은 기독인의 역사적 신앙이 표출된 증거”

한국복음주의신학회(회장:원종천 교수)는 4월 27일 한국중앙교회에서 ‘교회와 민족:과거, 현재, 미래’를 주제로 정기논문발표회를 가졌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개최한 이번 발표회에는 주제에 충실한 논문이 다수 발표됐고, 100분토론의 시간을 마련하여 또한번 주제를 중심으로 교회의 대국가 역할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또 성경신학, 조직 역사, 선교 실천 교육 등 3개 분과로 나눠 발표를 했고, 자유주제 발표 코너에서 하나님나라와 언약신학, 계시록 연구, 종말론, 시편설교, 선교, 기독교 양육관 등 제분야를 망라한 발제가 있어서 가히 복음주의권 최대 학회다운 규모를 자랑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정기논문발표회에서 ‘교회와 민족’을 주제로 한 발제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발표회에는 무려 22개의 논문이 소개됐다. 발표자들은 3·1운동의 정신을 구현하여 오늘의 교회가 시대의 아픔을 품고 위로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정기논문발표회에서 ‘교회와 민족’을 주제로 한 발제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발표회에는 무려 22개의 논문이 소개됐다. 발표자들은 3·1운동의 정신을 구현하여 오늘의 교회가 시대의 아픔을 품고 위로해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선 박명수 교수(서울신대)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에 미친 영향’을 주제로 발제했다. 박 교수는 1918년 독일 항복 선언 이후 발표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 선언이 3·1운동의 배경이 되었고 임시정부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각종 청원서에 영향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윌슨의 원칙 선언에는 기독교선교사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논찬을 한 장동민 교수(백석대)는 “박 교수의 논문은 임시정부의 헌장이 기독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이에 부합하는 자료들을 모은 것”이라면서 “1910~20년대 당시는 기독교에 근거한 미국식 민주주의 뿐 아니라 공산주의, 아나키즘, 사회진화론 등 서구적 정치사상과 대종교, 천도교 등 동양종교의 영향을 받은 정치사상이 공존 투쟁하고 있었던 시기였다”고 비평했다.

분과발표 중 박용규 교수(총신대)는 ‘기독교 민족운동의 발흥:평양대부흥운동부터 3·1운동까지’ 논문에서 대부흥운동이 사회개혁과 기독교민족운동을 촉진시킨 중요한 사건이었다고 밝혔다. 박 교수는 “평양대부흥운동은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영적으로 눈을 뜬 한국인들은 민족운동에 적극 동참했다”면서 “그 전형적인 사례가 다수의 서북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이 참여한 신민회였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지원 교수(한국성서대)는 “대부흥운동(1903년 원산부흥운동부터 1909년 백만구령운동까지)과 기독교운동과의 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요구된다”면서 “한 예로 발제자가 주장한 상동교회 청년회 주최 구국기도회는 당시 부흥운동을 선호했던 선교사들이 주장한 비정치화의 대척점에 있었다”고 논박했다. 또 오 교수는 “(박 교수가) 평양대부흥운동과 기독교민족운동과의 연계성을 추론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로 신민회를 예로 들었는데 신민회 탄생에 커다란 역할을 한 도산 안창호는 기독교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흥운동에 매우 부정적이었다”고 설명했다. 오 교수는 “안창호는 부흥운동의 감정적 카타르시스가 조선의 민족운동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했다”면서 “이 시기 기독교민족운동을 하신 분들 대부분은 대부흥운동에 가담하기 보다는 기울어가는 국운을 안타까워하여 민족운동에 가담했다”고 말했다.

정흥열 교수(아신대)는 ‘3·1운동에 대한 신학적 평가’ 발제를 통해서 3·1운동에 교회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이 사실이며 교회가 3·1운동을 통해 추구했던 기독교적 가치를 오늘의 교회가 본받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정 교수는 “1907년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로 하여금 비정치화와 몰역사화하게 만들었다는 비판적 견해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3·1운동은 교회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평가를 뛰어넘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사건”이라고 밝혔다. 이는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의 역사적 책임적 신앙이 표출된 증거라고 부연했다. 또 정 교수는 3·1운동에는 세계정신과 대화하는 신앙이 담겨있었다고 지적했다. 3·1운동의 태동에는 세계의 정신과 함께 호흡하며 이를 신속하게 받아들였던 기독교 선각자들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알렸다. 이어 3·1운동에는 사회를 통합하는 신앙관이 드러났다면서 타종교와 함께 하고, 남년간에도 통합을 이뤘다고 소개했다.

정 교수는 “그러나 3·1운동의 결과 좌절을 맛본 기독교인들은 미국이나 중국 등으로 망명했으며 일부는 변절했고, 역사에 대한 회의를 신비주의와 이단신앙으로 대리만족하기도 했다”면서 “민족의 고난과 함께 하는 교회만이 그 민족 가운데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박찬호 교수(백석대)는 정 교수의 논문에 대해 평가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옳다고 하지만 오늘날 (현실적으로 교회가) 어디까지 어떻게 참여할 것인가는 어렵고 고민이 필요한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밖에 눈에 띄는 논문으로 김광성 교수(주안대)는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중 양국에서 발생한 민중운동에 미친 개신교 선교신학의 영향 고찰’에서 3·1운동에서 교회는 사회와 백성의 삶의 아픔에 동참하고 반응했기에 사랑과 존경을 받았고 이후 복음화와 교회성장도 얻었다고 제시했다. 그에 반해서 의화단 사건이나 5·4운동 등 중국의 민중운동들은 반기독교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초기 중국선교사들이 전통적인 선교신학의 영향을 받아 영혼구원에 중점을 둔 나머지 중국이라는 선교현장의 문화나 국민정서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고유경 박사(총신대학교)는 ‘3·1운동에서 전도부인의 역할과 의의’를 통해서 선교사들을 돕던 역할로 시작했던 전도부인들이 3·1운동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을 다수의 관련 통계를 들어 알리면서 전도부인들이 민족사에서 감당했던 역할들이 더 조명되어야 한다고 바람을 피력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