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 따라 함께 희망으로 갑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룻 1:21)

총회장 이승희 목사(반야월교회)
총회장 이승희 목사(반야월교회)

우리가 희망을 기대하는 이유는 현재가 절망스럽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상실한 채 신음하는 청년들, 심각한 국가경제로 한숨 짖는 국민들, 끝 모를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는 정치권, 터져 나오는 사회적 이슈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성경적 가치기준까지 파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안타까움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공교회의 훼손과 거룩한 질서의 파괴가 우리에 의해서 자행되고 있습니다. 새로워지려는 결단과 자정능력은 이미 상실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다음세대를 향한 꿈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기대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교회와 다음세대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절망의 상황에서 희망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을 룻기에서 찾아봅시다.

절망의 현장-베들레헴

룻기서는 흉년을 만난 베들레헴(떡집)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떡집(베들레헴)은 먹을 것이 있고 양식이 제공되는 곳입니다. 그곳이 때 아닌 흉년으로 고통과 죽음의 장소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흉년의 한가운데 엘리멜렉(여호와는 나의 왕)과 나오미(기쁨)가 있습니다. 왕 되신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고, 기쁨과 즐거움으로 살아야 할 신앙의 가정이 탄식과 눈물로 애통하는 환란의 현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모압행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더 큰 불행을 경험합니다.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이 죽음을 맞이합니다.(3절,5절) 흉년을 피하려다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유다 베들레헴과 흉년.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압. 이 모든 것이 아이러니한 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어울리지 말아야 할 ‘어울림’입니다. 이것은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실제적 삶의 현장입니다.

우리의 베들레헴은 어떻습니까? 흉년입니까? 풍년입니까? 혹시 이 안타까운 베들레헴의 현실이 우리 총회와 교회, 내 가정과 내 심령의 상태는 아닙니까?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유다의 베들레헴입니까? 아니면 모압 땅입니까?

절망의 원인-불신앙

이 안타까운 불행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절망의 포로로 만들어버린 것입니까?

첫째는 시대적인 타락입니다.

유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찾아온 때를 사사시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절) 사사시대는 이스라엘의 신앙적 암흑기입니다.(삿 17:6)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보다 자신들의 생각과 판단을 더욱 더 중요시하며 욕망의 시대를 살던 때입니다. 미친 듯 질주하는 오늘의 세상이 타락의 끝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둘째는 불신앙적 삶입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흉년을 피하기 위해 모압으로 떠나는 것을 선택합니다. 모압은 불신앙의 대표적 현장입니다.(신 23:3) 따라서 이들의 모압행은 육의 방식을 따른 불신앙의 산물입니다. 이들의 불신앙적이고 패배적인 삶의 모습은 자녀들의 이름에서도 나타납니다. 말론(병약함, 나약함)과 기룐(낭비, 소진)입니다. 부모의 이름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 시대를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신앙상태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며느리를 맞이한 것도 불신앙적인 삶의 단면을 보여줍니다.(4절) 이러한 불신앙적 삶의 결과는 결국 죽음으로 인한 ‘다 잃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신앙입니까? 불신앙입니까? 시대를 따라 휩쓸려 내려갑니까? 아니면 말씀의 노를 저어 세상을 거슬러 올라갑니까? 신앙인은 시대의 흐름과 상황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어떤 시대 속에서도 신앙적 선택과 결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그려내는 사람입니다.

희망의 선택-베들레헴으로의 귀향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일어나 다시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다시 희망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첫째, 희망신앙(希望信仰)이 필요합니다.

절망의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신앙입니다. 본문에는 처절한 절망의 상황에서 매우 중요한 하나의 상황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남겨두심’입니다.(3절, 5절) 남편이 죽고, 두 아들이 다 죽어버린 절망의 상황에도 하나님은 나오미를 남겨두셨습니다. 당시 남겨진 나오미는 보잘 것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자신을 ‘마라’(슬픔)라 부르라고 했습니다.(20절)

그러나 훗날, 하나님은 남겨둔 이 여인을 통하여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다윗의 족보를 열어가셨습니다.(룻 4:13~14) 메시아의 탄생을 이어가셨습니다.(룻 4:17) 이 마지막 절망의 세대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겨 놓으셨다고 믿으십시오. 보잘 것 없고 나약한 우리일지라도 하나님이 이 세대에 남겨 두셨다면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믿음이란, 하나님으로 인하여 희망을 기대하는 것입니다.(합 3:17~19)

둘째, 주권신앙(主權信仰)이 필요합니다.

나오미가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시점부터 그동안 한 번도 언급이 없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갑자기 등장합니다. 나오미는 그 여호와 하나님을 ‘전능자’라고 부릅니다.(20절, 21절) 사람에서 여호와 하나님께로 주어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것이 주권의 전환입니다. 이것이 주권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에게 내 삶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셋째, 회개신앙(悔改信仰)이 필요합니다.

나오미는 절망의 현장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돌아갔습니다.(6절) 불신앙의 자리, 실패의 자리, 타락의 자리였던 모압 땅에서 일어나서 다시 희망을 기대하며, 희망의 소리가 들려오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희망의 기회를 얻는 단초입니다.

오늘 희망을 기대하는 우리에게도 베들레헴으로 ‘돌아감’이 필요합니다. 슈브(회복하다, 속하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슈브! 은혜로 이끄시는 부르심을 들으십시오. 슈브! 희망의 기회를 주시는 소리를 들으십시오. 이것이 회개의 신앙입니다.

희망의 결과-회복

돌아온 나오미에게 흉년은 풍년으로 바뀝니다.(22절) 넉넉함으로 필요가 채워졌습니다.(룻 2:14)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2장에서 ‘우연히’(3절)와 ‘마침’(4절)이라는 표현을 보십시오. 때를 맞추시는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입니다.

룻기서는 역전의 드라마입니다. 흉년이 풍년으로, 눈물이 웃음으로, 헤어짐이 만남으로, 죽음이 생명탄생으로, 헤어짐이 만남으로 바뀌는 모습을 그리며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룻기서에 나타나 있는 이러한 희망의 은혜가 이번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통하여서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일어나 함께 희망으로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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