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자리에 기꺼이 선 16명 기독교인은 커다란 자랑

청주시내 한 복판에서부터 우암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목을 들어서면 3·1공원을 가장 먼저 만난다. 3·1공원의 정점은 다섯 개의 인물상과 횃불조형물이 설치된 광장이다. 그런데 전체적인 구조가 어쩐지 균형이 맞지 않는 듯 살짝 어색하다. 손병희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로 이어지는 다섯 개의 동상 곁, 현재 횃불조형물이 서있는 자리에는 1988년 공원 조성 당시 ‘정춘수’라는 또 다른 인물의 동상이 함께 서있었다.

충북 청원 출신의 정춘수는 협성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 1919년 당시에는 원산 상리교회를 담임하던 남감리회 소속 목사였다. 민족대표 33인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거사 후 일제로부터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에도 신간회, 흥업구락부 등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조선감리교 제3대 감독에 선출되며 교회지도자로서도 명성을 알렸다.

하지만 감독직에 오른 직후부터 그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호응하면서 강연과 집필을 통해 친일 행각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매국노로 돌변한 것이다.

정춘수는 민족대표 33인 중 YMCA 간사였던 박희도, 천도교 대표였던 최린과 함께 변절자 그룹으로 분류된다. 박희도와 최린은 친일단체 ‘시중회’ 결성, ‘내선일체(內鮮一體)’를 표방한 잡지 <동양지광> 창간 등으로 이전까지 민족주의자로서 헌신했던 자신들의 삶을 부정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들로 인해 마치 민족대표 33인 모두가 변절한 듯 항간의 오해가 퍼져나간 시절도 있었다.

민족대표들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민족대표들이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을 담은 기록화.

그러나 변절자들은 이들 셋으로만 국한된다는 것이 정설이다. 한 때 33인 중 최후의 생존자였던 이갑성에게 창씨개명설과 밀정설 등 친일의혹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대부분 헛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33인은 일제의 삼엄한 철권통치 아래서 목숨을 걸고 ‘민족대표’라는 이름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해냈으며, 변절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인물들은 일제의 끈질긴 협박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정춘수를 민족대표의 길로 이끈 오화영 목사는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무려 세 차례의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독립지사로서 지조를 지켰으며, 정춘수의 동료로 33인 중 마지막으로 합류한 인물인 신석구 목사는 이후에도 신사참배 반대로 일제에 끝까지 항거했다. 정춘수의 모습이 사라진 3·1공원의 바로 옆 자리를 신석구는 지금도 굳건히 지키고 있다.

충북 출신 민족대표들을 기리는 청주 3·1공원 광장 맨 오른편에 서있던 정춘수 목사의 동상은 주인공의 친일행적이 알려지며 철거되고, 그 자리를 횃불조각품이 대신하고 있다.
충북 출신 민족대표들을 기리는 청주 3·1공원 광장 맨 오른편에 서있던 정춘수 목사의 동상은 주인공의 친일행적이 알려지며 철거되고, 그 자리를 횃불조각품이 대신하고 있다.

이들 뿐 아니다. 기독교계 대표였던 유여대 김병조 목사는 1919년 3월 1일 당일에 태화관 모임에 참석하는 대신, 같은 날 평안북도 의주의 만세 봉기를 이끌었다. 유여대 목사는 체포되어 2년 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목회자이자 교육자로서 길을 변함없이 달려갔고, 김병조 목사는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유 목사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숨졌으며, 김병조 목사는 해방조국의 감격을 채 누리지도 못한 채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이들의 삶을 실패나 불운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당시 <기독신보> 서기였던 또 다른 민족대표 박동완은 2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에도 시류에 굽히지 않고 항일의 길을 걷다가, 이역만리 하와이에서 일제에 겪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며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기독교계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남강 이승훈은 일제의 보복으로 10여 년에 걸친 옥살이를 이어간 것으로도 부족해, 제 몸처럼 아낀 오산학교가 불에 타고 결국 폐교되는 아픔까지 겪는다. 일제는 1930년 숨진 그의 시신기증까지 방해했다. ‘죽은 이승훈’조차 그들에게는 두려운 존재였다.

민족대표들 대다수가 이렇듯 우직한 애국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단지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자신들의 종교를 이끌던 지도자였을 뿐 아니라, 철저한 민족주의자이자 지식인으로서 시대에 대한 고민과 조국 독립에 대한 신념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민족대표들에게는 변절자들이라는 오해 뿐 아니라 학생들과 민중들 뒤에 숨어서 소극적인 모습으로 일관했다거나, 일제에 의연하게 맞서기 보다는 제 몸 보신하는 데 급급했다는 비난이 오랫동안 쏟아졌다.

하지만 민족대표들이 3월 1일 봉기 당일에 지척인 탑골공원으로 향하지 않고 끝내 태화관에 머물르다 자수를 택했던 데는, 자신들이 현장에 등장할 경우 흥분한 군중들의 시위 격화로 희생이 커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큰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민족대표 33명의 이름이 담긴 독립선언서와 공약3장 전문.
민족대표 33명의 이름이 담긴 독립선언서와 공약3장 전문.

올해 만세운동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책 <1919>를 발표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는 한양대 사학과 박찬승 교수는 “민족대표는 자수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무장한 경찰들에게 다치는 것을 우려해 독립선언 사실을 통고했을 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실제로 33인들은 생명을 내놓고 ‘민족대표’의 자리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는 것은 여러 증거와 증언들을 통해 확인된다. 독립선언서에 기록한 대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최후의 1인’이 되고자 했다. 33인의 서명을 누구부터 시작하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남강 이승훈이 ‘이 순서는 죽는 순서’라고 했던 말은 그냥 농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전에 이갑성이 남긴 증언에 따르면 독립선언문 작성을 의논할 때 모인 사람이 약 70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판사를 지낸 함태영 목사가 “필경 저 일본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극한의 일을 할 텐데, 일본법으로 우리 70여 명이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면 다음에 계속 할 사람이 없지 않느냐?”면서 순번을 정해 3번에 걸쳐 차례로 선언문에 서명하자고 제안한다. 그 제안을 옳게 여겨 처음에 1차 서명자 25명을 정했는데, 계속해서 너도 나도 먼저 죽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33인으로 늘었다는 설명이다.

종교지도자들 말고도 당초 민족대표로 교섭했던 고위 관료와 저명인사들은 숱하게 많았다. 그러나 자신들의 지위와 안전을 염려한 권력층들은 고난의 자리를 외면했고, 가톨릭은 불참을 선언했으며, 유림들은 망설이다가 때를 놓쳤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 무려 16명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했다는 사실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커다란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 후예들은 과연 선배들이 걸었던 희생과 헌신의 길을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종교’와 ‘지도자’라는 허울 뒤에 숨어서 배신과 변절의 길로 돌아서고 있는가?” 세상은 이 질문을 던진다.

정춘수의 동상은 1996년 시민들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지금 우리가 정춘수와 박희도의 길을 걷는지, 오화영과 신석구의 길을 걷는지 반성해보면 깨닫게 될 일이다.
 

만세운동 이끈 또 다른 민족대표들

3·1운동 개시 이듬해인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에는 48명의 사진이 지면 하나를 가득 채웠다. 민족대표 33명을 비롯한 3·1운동의 지도자들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다는 것이 사진에 딸린 기사의 보도내용이었다. 48명 명단 속에는 민족대표 33명 중 만세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한 김병조와, 이미 옥중에서 숨진 양한묵을 제외한 17명이 추가됐다.

독립선언문을 직접 작성한 최남선을 비롯해 함태영 목사, 학생지도자였던 김원벽과 강기덕, 명신학교 교사 김도태, 평양기독교서원 총무 안세환 등이 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을 점유했던 기독교인의 비율이 전체 48인으로 확대되면 총 24명으로 딱 절반을 차지한다.

<한겨레>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올해, 만세운동을 현장과 배후에서 이끌었던 민중대표 48명을 선정해 발표한 바 있다. 이 명단 가운데도 겨레의 영원한 누나 유관순, 제암리사건 등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34번째 민족대표’로 불렸던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선교사, 동경2·8독립선언에 이어 3·1운동에도 앞장서 여성들의 동참을 이끌었던 김마리아, 조국을 위해 자신의 팔과 목숨까지 바친 문용기와 윤형숙 등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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