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하나님께서 나에게 달동네의 가난을 보게 하시고, 그에 대비되는 황금을 내 손에 쥐어 주신 것은 황금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였다. 황금은 우리 시대의 맘몬 신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우상이다.

성경은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누군가 하나님 대신 돈을 섬기고 산다면 그는 이미 돈의 종이 된 것이다. 그는 아마도 주야로 돈을 묵상하고 살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돈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에는 지식의 사람도 있고, 권력의 사람도 있고, 인기의 사람도 있고, 쾌락의 사람도 있지만 ‘돈의 사람’이 제일 많아 보인다.

예수님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2)라고 말씀하셨다. 눈이 밝아야 밝은 존재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눈을 어둡게 하는 것이 바로 돈의 유혹이다. 돈에 눈이 머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문자 그대로 ‘돈의 사람’이 된다.

황금에 눈이 멀지 않고 평생을 밝은 눈으로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마6:20)고 말씀하셨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방법은 다양하다. 헌금도 한 방법이다. 이웃돕기도 한 방법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체의 헌신은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일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위해 돈을 사용하기보다 하늘에 투자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신다. 그런 사람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이고, 그런 사람들이 많은 나라가 좋은 나라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붙들면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기울여야 할지, 우리가 가진 재물을 어디에 써야 할지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생각을 붙들면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 기울여야 할지, 우리가 가진 재물을 어디에 써야 할지 깨닫게 된다.

나는 처음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소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소명이라고 말하기에도 너무 거창하다. 나는 다만 하나님께서 나를 옥수동으로 부르신 데에는 합당하신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뜻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려웠던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길 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각을 붙잡기 위해서 먼저 나는 사람의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내가 침묵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때문이었다. 나의 경우 2000만원이라는 큰돈을 앞에 두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게 해야 할 일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되고 연구될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되고 그 생각을 품게 된다.

그러나 교회에 다닌다고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니다.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공기와 태양 없이는 어떠한 생물도 존재할 수 없듯이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말씀 없이 살 수 없다.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대로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다. 강단마다 설교가 넘치고 곳곳마다 성회와 세미나가 열리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 목말라하고 있다. 마치 홍수 때 먹을 물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영적 부흥, 참된 부흥은 하나님을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손을 경험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가 가져야 할 태도는 하나님의 생각을 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을 가장한 사람들의 생각과 몸짓에 질렸다. 그동안 우리는 설득력과 화려함을 갖춘 언어의 조련사들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것을 하나님의 생각으로 착각했고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듣기를 원하는 것은 무섭도록 진실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나의 철학, 나의 사상, 나의 신념, 나의 경험은 사라져야 한다. 순수한 영생의 말씀만이 선포되어야 하고, 우리의 죄를 자르고 우리의 허물을 씻어주고 정결하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 강같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순수한 것일수록 불순한 것을 용납할 수 없고 진실한 것일수록 부정직한 것을 용납할 수 없다. 하나님의 생각을 꼭 붙들자. 그리고 하나님을 만날 만한 때에 만나야 한다. 그가 가까이 계실 때에 그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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