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어느 목사님은 “목사는 원룸에서 살아서는 안 되고, 기도의 골방, 말씀의 책방, 위로의 심방, 즉 쓰리룸에서 살아야 된다”고 하시며, ‘기도는 만사(萬事)를 변화시킨다’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인다’고 늘 강조했습니다. 그 교회에서는 ‘1000일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목회를 마무리하면서 기도로 만사를 변화시키고 하늘 보좌를 움직여 자신의 욕망을 채웠습니다. 아들을 세습이 아닌 후임자로 세우려고 총회도 탈퇴, 노회도 탈퇴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데 노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해주지 아니한다는 이유를 달아서 말입니다.

사실상 기도의 본질은 세상만사를 변화시키고, 하늘보좌를 움직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변화되는 것에 있습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거짓됨을 깨닫고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는 우리의 속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골 1:10~12)

언제나 우리는 ‘내 뜻을 이룰 것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인가?’라는 기로에 서서 기도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고 삽니다. 만사를 변화시키고 하늘 보좌를 내 욕망으로 움직여보려는 떼씀과 강청의 기도가 많습니다.

조만간 우리 교단은 56번째로 전국목사장로기도회를 엽니다. 금번 기도회 주제가 ‘일어나 함께 희망으로’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얼마나 절망적이면 이런 주제를 잡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우리는 변하지 아니하면서 만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보좌만 움직이려는 가장 현실적이고, 세상적인 기도회가 될까 염려가 됩니다.

만일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절망 속에’ ‘더 죽음 속에’ 있게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기도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고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행위를 하는 정성만 드리는 무속신앙의 기도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100일 기도, 1000일 기도가 우리 신앙 속에도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기로에는 언제나 세상적인 기도와 성경적인 기도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기도를 선택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욕심만 채우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언제나 자기 자신이 먼저이고, 편안함을 추구하며, 말씀 안에서 한 약속도 자신의 목적에 반하는 것이라면 무시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기도를 선택한 참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기꺼이 순종하여 헌신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전국목사장로기도회의 주제가 마음적으로는 ‘일어나 함께 희망으로’를 넘어 ‘일어나 함께 주님의 뜻으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내 뜻대로’와 ‘하나님의 뜻대로’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밤새 기도하시고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6)고 하였습니다. 희망이 아닌 절망으로 십자가의 죽음으로 가셨습니다. 여기에는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는 주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가 금번 목장기도회에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희망으로 가게 하실 지, 절망으로 가게 하실 지 우리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의 기로에 선 참 기도자로서 우리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 변화는 삶의 순종이 되고, 그 순종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왜 우리는 이런 복됨을 누리지 못합니까? 기로에 선 기도자로서 바른 기도를 선택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구와 뜻만 위해서 기도하며 만사를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금번 목장기도회에서 우리는 이 기로에 선 기도자로서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기 위해 변화되고, 성화되는 기도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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