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경로(역사학자, 전 한성대 총장)

역사적 독립만세운동 물결, 민족통일의 큰 바다로 흘러라

 

I. 3·1운동의 정신과 역사성

지난 4월 11일로 우리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수립 100주년’ 이라는 기념비적인 행사를 모두 마쳤다. 이를 기리는 여러 모양의 뜻 깊은 행사와 축제의 마당이 국내외에서 펼쳐졌다. 그러나 일회적 행사로 그 의의가 끝날 일이 아니다. 그것은 3·1운동과 <임정>이 지닌 역사적 무게가 크고 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족분단 70여 년이 훌쩍 흐르면서 남북 사이에 넘을 수 없는 큰 장벽의 상이한 역사인식을 생각할 때 100주년의 기억·기념이 그렇게 기쁘지만은 않다. 이 짧은 글을 통해 다 언급할 수 없지만 100주년을 보낸 3·1정신과 <임정> 수립의 역사성을 짚어보며 남북 간의 역사인식에 관해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필자는 오래 전부터 “3·1운동은 세류(細流)가 모이고 쌓여 대하(大河)를 이룬 한민족 최대의 사건이다”라고 정의해 왔다. 우리나라의 근대사회로의 진입 단초(端初)인 병자수호조약(1876)은 매우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따라서 이후 한국근대사회로의 진행은 심하게 타율적으로 왜곡되어 진행되었다. 이런 역사적 왜곡과 타율성 극복을 위해 수많은 잔물결(細流)과 같은 운동들이 끊임없이 추진된 끝에 비로소 1919년 큰 강(大河) 곧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3·1운동의 이념과 정신은 <3·1독립선언서>에 잘 담겨있다. 이를 요약하자면 첫째 자주독립(自主獨立) 정신, 둘째 자유민주(自由民主) 정신, 셋째 인류공영(人類共榮)의 평화(平和) 정신, 끝으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꿈과 비전(Vision) 등으로 함축할 수 있다. “아아 신천지(新天地)가 안전(眼前)에 전개되도다. 위력의 시대가 거(去)하고 도의의 시대가 래(來)하도다. 바야흐로 신문명의 서광을 인류의 역사에 투사(投射)하기 시(始)하도다”고 하며 이제 이후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음침한 옛집(古巢)에서 힘차게 뛰쳐나와 ‘흔쾌한 부활’(欣快한 復活)의 빛을 향해 힘차게 나가자”는 희망찬 메시지 등이 <기미독립선언서>에 압축되어 담겨있다. 그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민족의 꿈과 비전까지 제시하고 있는 명 <선언문>이 아닐 수 없다. 3·1독립선언문의 의미는 명 선언문 외에도 <임정>을 탄생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II.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임시헌장> 10개조

<임정>은 국내에서 3·1독립운동이 발발한지 40일 만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 선포되었다. 이로서 수천년 내려오던 봉건 왕조와 제국(帝國)의 시대를 마감하고 민국(民國) 곧 대한민국(大韓民國)이라는 주권재민(主權在民) 새 나라가 탄생되었다. 그야말로 혁명적인 역사변혁이 아닐 수 없다. 100주년 행사를 앞두고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부르자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었던 것도 이러한 연유와 배경에서였다. 아무튼 <임정> 수립의 혁명적 성격은 <임시헌장 10조> 내용에 더욱 잘 담겨있다.

1919년 4월 11일자로 공포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은 10개 조항으로 되어 있다.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고 했다. 공화제, 공화정 논의는 1890년대 말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전후시기부터 대두되었지만 그 앞에 ‘민주’를 붙여 ‘민주공화제’라는 국가 정체(政體)를 공식적으로 제정, 선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도 막연한 공화제가 아니라 일반백성 곧 민(民)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民主’를 공화제 앞에 내세움으로 새로운 나라를 선포했다. 대한민국은 이전의 봉건왕조시대를 종식시키고 근본적으로 그것과 결을 달리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임시헌장> 제2조는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이라고 하여 의회중심의 내각제를 채택할 것을 밝혔다. 이 조항은 동년 9월 통합정부로 개편되면서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게 된다. 제3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무하고, 일체 평등함”이라고 되어 있다. 이 역시 매우 진취적인 조항이 아닐 수 없다. 과거 봉건왕조사회의 신분계급과 남녀귀천을 전면 부인하며 ‘일체 평등’을 헌법으로 제정한 것 또한 ‘혁명적’이라 할 것이다.

“3·1운동의 정신을 통일운동으로 이어가자!” 100년 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3·1운동의 정신이 60년 넘게 분단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반도의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식이 높다. 3·1운동 100주년을 통일을 향한 민족적 노력의 계기로 삼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사진은 총회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와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총회 3·1운동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며 만세운동 정신을 기리는 모습.
“3·1운동의 정신을 통일운동으로 이어가자!” 100년 전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일어났던 3·1운동의 정신이 60년 넘게 분단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한반도의 통일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의식이 높다. 3·1운동 100주년을 통일을 향한 민족적 노력의 계기로 삼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사진은 총회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와 총회역사위원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총회 3·1운동 100주년 기념 감사예배에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하며 만세운동 정신을 기리는 모습.

임시헌장 제4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서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향유함”이라고 했다. 본래 초안에는 “조선공화국 국민은 신교, 언론, 결사 및 집회의 자유를 향유함”이라고 되어 있던 것에 ‘서신, 주소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첨가함으로 자유권을 더욱 확대시켰던 것이다. 제5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으로 공민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고 했다. 이 역시 초안에는 “조선공화국의 시민은 선거권 및 관리가 될 수 있는 권리를 가짐”이라고 되어 있었다. 당대 최고의 이론가이자, 각종 선언문을 기초한 조소앙(趙素昻)이 초안했다는 이 초안에서 우선 남녀 구분 없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했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이웃 일본의 경우도 아직은 여성들에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이 또한 혁명적 법규가 아닐 수 없다. 제5조 내용에서 또한 주목되는 바는 ‘조선공화국의 시민’이라는 대목이다. 우선 ‘조선공화국’이라는 나라 명칭에서 보듯 초안에서는 국명이 대한민국이 아니라 ‘조선공화국’이었음을 시사해주고 있으며 ‘시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점 또한 특이해 보인다. 이밖에도 ‘인민’과 ‘국민’ 및 ‘시민’을 구분해 사용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하겠다. 향후 이에 대한 법률적, 개념적 차이가 무엇인지 등에 관한 연구가 필요할 듯싶다.

제6조는 “대한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유함”이다. 이 조항은 초안에는 없었던 것으로 새롭게 삽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조항은 국민의 의무조항으로 국가운영상 꼭 필요한 법적조항이라 할 것이다. 국가와 정부를 세우는 주요 목적의 하나가 나라를 지키고 국민을 교육시키며 이에 따른 재정부담은 국민이 부담해야 한다는 점에서 마땅한 의무조항으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제7조는 “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진(進)하여 인류의 문화와 화평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이다. ‘국제연맹 가입’ 문제는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 제창하였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민족자결주의 14개 조항과 함께 국제연맹 결성을 제창하였다. 윌슨의 이같은 선언과 제안은 당시 우리나라를 비롯해 열강의 식민지배 하에 있던 약소국가들에게 독립의 꿈과 희망을 부여했기에 매우 환영받았다. 따라서 우리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이를 적극 환영하며 국제연맹 가입을 천명했던 것이다. 그러나 윌슨이 제안한 국제연맹은 여타 제국주의 열강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 내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아 실현되지 못했다.

제8조는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다. 이 조항은 초안에는 없었던 것으로 이 조항을 놓고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한 진보진영에서는 이 조항의 삭제를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나라를 망친 구황실을 우대한다는 것은 봉건왕조시대를 용인하는 것이기에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당시 <임정> 요인 가운데는 이시영(李始榮), 조완구(趙琬九) 등 구황실 출신 인사도 있었고 당시 국민적 전체 분위기 또한 아직 구황실과 완전하게 단절하거나 배척할 만큼의 상황은 아니어서 격론 끝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조항 제안자는 조완구로 알려져 있다. 제9조는 “생명형, 신체형, 및 공창제를 전폐함”이다. 이 역시 초안에는 없었으나 일제의 가혹한 무단통치 하에서 자행된 생명의 존엄성과 신체형 파괴 등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삽입된 것으로 이해된다. 공창제 역시 일제 하에서 묵인된 것이기에 이를 삽입한 것 같다. 마지막 10조는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이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하여 국토를 회복하면 바로 1년 안에 새로운 의회를 소집, 새 정부를 세우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하겠다.

III. 남북역사인식의 차이와 ‘만절필동’(萬折必東)희망

이상에서 본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헌장> 10개 조항 내용은 매우 진취적이며 ‘혁명적’이다. 또한 현재 시행되고 있는 현행헌법에 정신과 내용이 거의 그대로 전수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렇듯 <임시헌장>의 내용과 정신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어느 하나 흠잡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민주헌법 체제를 갖추고 있다. 문제는 이렇듯 훌륭한 <임시헌장> 법정신이 지난 100여 년간 우리사회에 오롯하게 시행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익히 아는 대로 남북으로 민족이 분단된 이후 남북 양측은 ‘민주공화제’를 정체로 삼고 있으나 3·1운동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남북 사이에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북측은 3·1운동을 ‘실패한 부르주아 운동’에 불과하며 ‘당과 수령님의 지도가 없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매우 저평가하고 있다. <임정>에 대해서는 더욱 비판적이다. ‘독립전쟁과 동떨어진 곳에서 외세에 의존하다 자치파와 독립파 간의 파벌싸움 끝에 인민으로부터 규탄과 배척을 받았다’고 비판의 강도가 높다.

이렇듯 민족분단 7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남북 사이 역사인식에 큰 편차가 있다. 통일을 전망하면서 향후 가장 어려운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남북 사이 벌어져 있는 역사인식의 간극을 어떻게 좁혀나갈 것인가이다. 어쩌면 정치, 군사, 경제적 통일보다 더욱 어려운 문제가 ‘역사통일’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서로 오고가며 소통하고 왕래하며 교류하다보면 그날이 오지 않겠는가.

윤경로 교수(역사학자, 전 한성대 총장)
윤경로 교수(역사학자, 전 한성대 총장)

작금 우리 한반도의 상황 변화는 마치 100년 전 <3·1독립선언서>에서 천명한 “음침한 옛집에서 뛰쳐나와 흔쾌한 부활의 빛을 향해 힘차게 나가자”는 그 대목이 마치 현실로 다가오는 듯하다. 지난해 4월 남북정상 간의 만남이 있었다. 또한 9월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능라도 5·1체육관에 모인 15만명의 평양시민들 앞에서 남북이 지난 70년간을 떨어져 살았지만 우리 민족은 5000여 년 동안 함께한 하나의 민족임을 천명함으로 큰 울림을 주었다. 지난 70여 년 동안 서로 간 높은 벽과 담을 쌓아온 남북 간의 불통(不通)이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가.

중국 고사(故事)의 한 대목인 ‘만절필동’(萬折必東)이란 구절이 떠오른다. 중국 황하의 물줄기가 수만 번 굴절을 하지만 종국에는 동쪽 황해 바다로 흐른다는 뜻이다. 남북문제를 놓고 그동안 천절, ‘만절’의 우여곡절이 있었고 앞으로도 없지 않겠지만 종국에는 분단의 굴절과 아픔을 넘어 민족 통일의 꿈이 실현되는 날이 기필코 오리라고 굳게 믿고 기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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