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여구 교수(인제대 서울백병원, 의사)

장여구 교수(인제대 서울백병원, 의사)
장여구 교수(인제대 서울백병원, 의사)

지난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임신 초기의 낙태에 대한 형사처분은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한다며 낙태죄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다. 2012년 임신한 여성과 태아를 별개의 생명체로 인정하고, “태아를 성장 단계에 따라 구분하여 보호의 정도를 달리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며, “낙태를 처벌하지 않거나 가볍게 제재한다면 낙태가 만연하고 생명경시 풍조가 확산될 것이다”라고 했던 판단을 뒤집은 것이다.

즉, 이번 헌재 결정은 임신한 여성과 태아를 별개의 생명체인 동시에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특별한 관계로 본 후,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찌 보면 낙태죄의 폐지나 개정에 관한 논쟁은 오늘날 여성들의 지위 향상과 인권 존중,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낙태 현장을 볼 때,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남은 기간 동안 얼마나 타당성 있는 합의를 이끌어낼지가 쟁점이 되고 있다.

현재 모자보건법은 본인이나 배우자의 우생학적·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 질환, 그리고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 강간에 의한 임신,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의 임신, 임신 유지로 인해 모체의 건강에 대한 위해나 위해 우려가 있다고 판단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낙태는 위의 예외 규정이 충족되지 않는 경우에도 암암리에 이루어져 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의하면, 2018년 만 15∼44세 여성 1만명을 대상으로 한 실태조사에서, 낙태를 결정한 이유(복수응답)로 ‘학업, 직장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 같아서’(33.4%), ‘고용 불안정, 소득 등 경제 상태로 양육이 힘들어서’(32.9%) ‘자녀를 원치 않아서’(31.2%)가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그 외에 ‘연인, 배우자 등 성관계 상대와 관계가 불안정해서’(17.8%) 등으로 나타났다. 조사 결과를 보아도 현재 낙태의 90% 이상이 모자 보건법상의 낙태가 허용되는 이유가 아닌 사회경제적 이유를 차지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렇듯 허울 뿐인 법률이니 당연히 개정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동안 낙태법이 가지고 있던 생명존중에 대한 상징성 또한 절대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낙태법의 완전폐지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66년 전에 만들어진 법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다면 개정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낙태법의 완전 폐지는 현 사회에서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다. 유예기간을 두고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여건을 하루빨리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낙태에 대한 인식개선 및 교육과 캠페인에 대한 노력이 그동안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낙태죄가 폐지되더라도 우리 사회가 도덕성을 바탕으로 생명존중이 충만한 사회라면 무엇이 걱정이겠는가. 원하지 않는 임신을 막기 위한 성교육, 생명존중 캠페인과 함께 낙태가 얼마나 잔인하고 책임감 없는 행위인지에 대한 정확한 자료를 공개하고 끊임없이 교육해야 한다.

또한 낙태의 문제를 여성이나 산부인과 의사에게만 부담 지울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공동의 책임이라는 풍토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이 건강한 생각을 가지고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책임질 수 없는 아이의 출생을 우리 사회가 해결하지 않는 한 낙태법은 여성에게 족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산부인과 의사의 낙태 시술 거부권도 당연히 논의되어야 한다. 낙태는 일선에서 매일 태아를 통해 생명의 경이로움을 경험하는 산부의과 의사에게 있어,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심적 고통이다. 낙태죄가 존재할 때는 그나마 법률을 들먹이며 설득할 수 있었겠지만, 이제는 의사가 낙태 시술을 거부하면 고발당할 위험에 처해 버렸다. 낙태 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예외규정을 포함해서 형법과 모자보건법 등 관련 법 개정을 위한 후속 조치도 함께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몇 년 전 임신 중 유방암 진단을 받았던 환자의 사례가 기억난다. 가족 모두 낙태를 하고 암 치료를 하자고 했지만, ‘나의 생명도 중요하지만, 뱃속 아기의 생명도 소중하다’며 한사코 치료시기를 분만 이후로 미루었던 젊은 산모 환자. 자신보다 오히려 이제 막 시작한 태아의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한 그 환자에게는 어떤 가치가 우선했던 것일까.

의학적으로 볼 때, 통상 수정 후 임신 6주가 되면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임신 10주가 지나면 손과 발이 확실히 구분되는 등 완전한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 과정은 기적 그 자체이며, 태아의 생명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아름답다.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태아의 생명권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며 갑론을박하고 있는 이 세상의 이기심을 향해 부탁하고 싶다. 우리의 삶은 모두 ‘태아’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제발 잊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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