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회 ‘교회와 국가’ 주제로 학술대회 열어
개혁신학회 ‘교회와 국가’ 주제로 학술대회 열어
  • 노충헌 기자
  • 승인 2019.04.1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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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할, 민족주의 범위 뛰어넘어야”

이상규 교수 “초기 기독교, 일제에 저항하는 동력으로 받아들여 급성장”
박응규 교수 “평양대부흥운동, 교회 본질 강화하며 민족운동 기여했다”
송영목 교수 “차별 정당화 위한 남아공 신학자들 성경 왜곡, 교훈 삼아야”

3·1운동 100주년을 맞아서 신학계도 3·1운동을 되돌아보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성찰하는 학술대회를 다수 열고 있다.

개혁신학회(회장:이광희 교수)는 4월 13일 총신대 제2종합관에서 ‘교회와 국가’를 주제로 2019년 봄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주제발표는 이상규 박사(백석대 석좌)가 ‘한국기독교와 민족, 민족주의’를 주제로 진행했는데 이 교수는 전래 초기 한국기독교는 일제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동력으로 받아들여져 급성장을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역할은 민족주의의 범위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국내에서 1886년 세례를 받은 한국인은 전국에 단 9명에 불과했고 1887년 25명, 1888년 65명, 1889년 100명에 지나지 않았다. 1890년에는 11명의 장로교 및 감리교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 해에도 세례교인 수는 장로교가 119명, 감리교가 36명, 도합 155명 뿐이었다. 선교사 입국 10년동안 기독교 신자는 500여명에 머물렀다.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이상규 교수(오른쪽)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기독교는 일제 시대에 민족자강운동의 방편으로 적극 수용됐기에 민족주의적 이미지를 강하게 띠고 출발했다고 해석했다.
개혁신학회 학술대회에서 이상규 교수(오른쪽)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이 교수는 한국기독교는 일제 시대에 민족자강운동의 방편으로 적극 수용됐기에 민족주의적 이미지를 강하게 띠고 출발했다고 해석했다.

그러다가 청일전쟁(1894~5) 이후 처음으로 숫적 성장이 보고되기 시작했고,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한국교회는 피선교국 역사에서 유래가 없는 급성장을 했다. 청일전쟁 발발 당시인 1894년 수세자는 236명에 달했다. 신자수도 큰 변동이 생겼다. 1895년 746명, 1896년 8496명, 1900년 1만8081명으로 격증했다. 또 1905년 2만6057명, 1920년 9만2510명, 1930년 12만5479명, 해방 당시는 3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상규 교수는 “이런 갑작스런 숫적 성장의 이유는 청일전쟁과 강화도조약으로 일제의 야욕이 노골화되자 조선사회가 위기의식을 가지게 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위기감을 느낀 조선 정부는 일본이 승리한 것은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정부는 조선도 서구와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 통로는 당시 기독교 뿐이었다.

이 교수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독교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면서 “구한말 우리 민족의 민족자강의식은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정신과 다를 바 없었으며 자연히 기독교 역시 충군애국의 종교로 인식되었다”고 평가했다.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는 1945년까지 지속됐고 한국의 기독교는 반일적 민족주의적 성격을 유지해 나갔다. 이는 기독교 국가의 지배를 받았던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들의 경우와 대비되는 것이었다. 이 교수는 “이런 특수한 상황이 1910년 이후 한국에서 기독교 수용을 보다 용이하게 했다”면서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결합되고 민족주의가 기독교 수용에 긍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독특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주기철 목사의 목회활동과 신사참배 반대투쟁을 민족운동 혹은 민족적 동기에서 보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을 내놓으면서 “주 목사는 민족의식과 민족주의적 시대 정신에 무지하거나 무관심하지 않았으나, 그의 사회활동을 움직였던 신념은 하나님의 계명에 충성하고자 함이었다”고 강조했다.

분과 발표자 가운데 박응규 교수(아신대)는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일제가 바랐던 비정치화, 즉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분리되는 방향으로 나갔다는 세간의 주장을 반박했다. 박 교수는 “평양대부흥운동이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추구했다는 이유로 그것이 비민족화의 길을 자초했다고 속단해서는 안된다”면서 “오히려 민족 문제를 신앙의 내면적 에너지로 응축하여 교회의 본질을 강화하면서 일제하에서 더 힘있게 민족운동에 기여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부흥운동은 특성상 신앙과 국가나 사회의 문제를 분리시키는 경향이 있음도 사실이지만 회심을 강조하면서 민주적 성향, 개인의 자긍심, 그리고 자치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키는 결과를 자아낸다. 박 교수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 이후 1919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주역 길선주 목사 같은 이도 일제의 합방이 임박했을 때 구국기도회를 제안했고 나라의 독립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올렸다. 또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한국교회는 이 시기에 국가적 위기를 외면하지 않고 구국기도회나 조직적인 정치활동 등으로 항일의식을 표출했다.

박응규 교수는 “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신앙을 순화함으로써 영적 에네르기를 형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정교분리라는 교두보를 마련해서 오히려 일제하에서 민족운동의 한 요인이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언급했다. 또 박 교수는 “대부흥운동은 단기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정치나 민족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게 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분과 발제자인 송영목 박사(고신대)는 ‘교회와 국가의 관계:아파르트헤이트와 신약성경 해석을 중심으로’를 통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신학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왜곡한 사례를 소개했다. 남아공 신학자들은 △예배 중 언어와 인종별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도행전 2장의 국가와 언어 장벽 해소는 단회적 사건일 뿐이다 △국가를 향해 저항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 안에서 육체적인 차이점(할례자, 무할례자, 종, 자유인)을 인정하고 영적 통일성만 유지하면 된다 △국가는 처한 형편을 고려하여 인종 및 언어적으로 분리 개발을 해야 한다 등의 주장을 했다.

송영목 교수는 “남아공 정부는 인종간 결혼금지, 인구 등록법, 그룹 지역법과 같은 차별정책을 추진할 때 일부 목회자들의 신학적이며 정서적 후원을 받았다”면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공적 영역에서 왜곡된 신앙과 성경의 오석으로써 여론을 조작하고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다는 경고를 한국교회는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송 교수는 “성경이 해석되고 적용되는 곳은 힘과 이념과 상황이 충돌하여 힘의 대결이 벌어지는 장소와 같다”면서 “교회는 좌우로 치우치기 쉬운 이념보다 복음정신을 위에 두고, 신앙고백과 실천의 일치에 힘씀으로써, 모든 이들의 평화를 촉진하는 복음의 공공성을 사회 속에 나타내야 한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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