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외로움과 갈망 풀어갈 정서적 연대 중요 … ‘마음의 다리’ 놓아야 진짜 사역 시작된다

‘리더’ 아닌 ‘친구’가 필요한 청년대학생
프로그램 성과에 집중하면 영혼 잃는다

 

김의엽 간사(기독대학인회(ESF) 부산지구)
김의엽 간사(기독대학인회(ESF) 부산지구)

지난 여름 학생들과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약 2주간 5개국을 돌았으니 꽤 바쁜 일정이었다. 온종일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에 하루가 고됐다. 숙소로 복귀하는 길에 마트에 들려서 먹거리를 사려는데, 한 학생이 나를 불러세웠다. 그리고 10유로(약 1만3000원)를 주면서 말했다. 참고로 이 학생은 당시 21세, 필자는 37세였다.

“간사님, 마트 가시는 거면 제 것도 좀 사다 주세요. 우유 하나랑, 간단한 초콜릿, 그리고 하몽(스페인식 햄) 하나 사다 주세요.”

나는 이 학생의 심부름 부탁이 우습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그러나 평소 그 형제와의 친분과 악의가 없는 그 형제의 마음을 잘 아는 터라 웃으면서 받아쳤다.
“○○형제, 지금 나한테 심부름시키는 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장난스럽게 멱살을 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이 형제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 간사님, 죄송합니다. 그럼 나머지 잔돈으로 간사님이 드시고 싶은 거 사드세요.”

과거 청년대학생 복음화 전략은 대규모 집회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권위가 아닌 친구가 되는 것이 전략의 핵심이다. 혼밥, 혼술로 정의된 청년대학생의 영적·정서적 외로움도 친구라는 사역만이 해결할 수 있다. 사진은 기독대학인회(ESF) 부산지구 사역 현장들.
과거 청년대학생 복음화 전략은 대규모 집회가 핵심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권위가 아닌 친구가 되는 것이 전략의 핵심이다. 혼밥, 혼술로 정의된 청년대학생의 영적·정서적 외로움도 친구라는 사역만이 해결할 수 있다. 사진은 기독대학인회(ESF) 부산지구 사역 현장들.

지도자에 대한 이 시대 젊은이들의 인식을 대변하는 이야기라 생각되어 소개했다. 이들은 직책이나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리더가 아니라 친구가 필요하다. 친구로서 다가가야 하고 거기에서부터 신뢰를 얻어야 한다. 부여된 권위가 아니라 그 권위를 획득해야 한다. 무결점의 리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공유하면서 마음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진짜 모습을 만나게 되고 진짜 사역을 시작할 수 있다.

필자는 1982년생이고 학번으로는 01학번이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지만 ‘국민학교’를 다닌 마지막 세대이다. 필자의 부모격인 베이비부머 세대의 정서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고 그 정서가 어느 정도는 주입된 세대이다. 그래서 나이 많은 어른이나 지도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다. 동시에 현시대의 대학생들과 교제하면서 이들이 갖고 있는 깊은 수치심과 외로움에 대해서 공감하고 있다.

2006년부터 올해까지 14년째 대학생 선교단체에서 간사로 섬기고 있다. 사역을 하는 이 기간, 많은 문화적인 변화가 있었다. 스마트폰의 해악성을 이야기하던 분들도 이제는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신문을 본다. 식당에서 서로 계산을 하겠다고 소란을 피우기보다는 한 사람이 카카오페이로 계산을 하고 각자의 몫을 송금한다. 남학생들도 눈썹을 다듬고 남성용 BB크림을 바른다. 도서관에 자리를 잡기보다는 스타벅스에 자리를 잡고 책을 편다. 결혼을 위해 연애를 하기보다는 ‘그냥’ 본능에 이끌려 사귄다. 평생직장을 꿈꾸고 집 마련 계획을 세우기보다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아서 여행 갈 계획을 세운다.

고민 상담은 부모와 나누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하거나 혼자 고민한다. <청년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고민 상담은 41%가 친구와, 33.2%가 혼자서, 17.7%만이 부모와 한다. 결혼은 필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청년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38.1%만이 결혼을 했거나 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이런 문화적인 변화에 맞물려 청년대학생 선교단체 사역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과거에는 선교단체들이 경쟁을 하듯 전도를 했다. 그래서 서로 공세적으로 신입생을 만나고 자기 사람을 만들기에 치중했다.

그러나 이제는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이 사역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실제로 <청년 트렌드 리포트>에 따르면 종교를 믿을 의향이 있는 대학생은 전체의 11.4%이고, 이 중에 30%만이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정도이다. 바꿔 말하면 100명 중에 3명이 기독교에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역 환경의 변화는 캠퍼스 선교단체들의 인식도 바꿔 놓았다. ‘우리 공동체에 한 사람 더 오느냐 마느냐’와 같은 편협한 고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기라는 인식을 갖게 했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런 사역 환경의 변화는 위기인 동시에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변화라 생각한다. 오히려 이런 변화는 과거를 반성하게 하고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과거의 기독 공동체는 사각지대가 너무 많았다. 수적인 성장을 지향하고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 포장에 치중했다. 프로그램 중심적인 공동체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유치할 수 있지만, 그 주변의 공동체는 힘이 빠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큰 교회나 큰 선교단체가 공세적일수록 그 주변의 작은 공동체들은 사람이 뜸해진다. 마치 동네에 대형 마트가 하나 들어서면 주변의 작은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되듯이 그렇게 된다. 이는 공동체 간에 발생하는 사각지대이다.

사각지대는 공동체 안에서도 발생한다. 프로그램 중심 사역은 일단 그 프로그램의 완성도가 중요하므로 사역자들은 프로그램의 완성에 치중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에 집중하다보면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에겐 관심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프로그램이 잘 될 때는 그 프로그램에 맞는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공동체를 채우게 되고 이는 또 하나의 집단 이기주의가 된다. 그 프로그램을 선호하는 사람들과 그 프로그램에 맞는 은사자들을 중심으로 공동체의 기득권이 재편된다. 일종의 승진 시스템 같다.

이렇게 프로그램 중심적인 기독 공동체는 어딘가 모르게 기업의 모습을 닮았다. 사이즈를 키워야만 생존하는 기업 말이다. 반면 용기 있는 생각은 지금 당장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더라도 본질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다. 성경적 기독 공동체의 특징은 복음이 가진 생명력에 대해 집중한다. 그리고 그 확신에서 오는 대담함이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 공동체의 특징이다. 잠깐의 성과가 아니라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다. 가시적 성과에 급해져서 공동체를 세력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변화’에 집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대담한 마음을 가진 분이셨다.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애써 숨기려고 하셨다. 또 같은 편이 되면 한 번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치세력을 멀리하셨다. 끝내는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위대하게 망하셨다. 예수님이 이처럼 대담하게 사역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제자들에게 전달한 복음의 생명력을 믿으셨기 때문이다.

다시 요즘 학생들 이야기를 해보자. 이 시대 젊은이들은 자신을 마음껏 꾸미고 치장하고 다녀서 자신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마음은 수치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윗세대의 정죄가 주는 수치심, 또래 간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수치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신감 있게 행동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매우 여리다. 혼술, 혼밥 문화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개인주의적이고, 원룸에서 살며 어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유동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런 개인주의적이고 유동적인 삶이 이들에게 해방감을 주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해방감이 주는 불확실성은 심각한 스트레스의 원인이 된다.

이들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기보다 자신들의 기호가 진리이다. 그래서 심리적으로도 불안정하다.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이처럼 이 세대는 수치감을 느끼고 있고, 불안감, 외로움을 느끼고 있다. 이들은 참된 관계에 목말라한다. 겉으로는 개인주의적이지만 그래서 더욱 공동체에 소속되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는 능력자가 아니라 친구가 필요하다. 친구를 찾는 이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세력화에 이용하려는 사람인지, 정말 친구가 되어줄 사람인지 알아차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어쩌면 이런 친구 됨은 복음의 본질일 것이다.

사역을 하다 보면, 이 시대 젊은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도 절대 진리를 찾고 싶은 영적 갈망이 있음을 보게 된다. 이들의 외로움은 정서적이기에 친구가 필요하다. 이들의 외로움은 동시에 영적이기에 하나님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국은 이들이 하나님을 찾고 만나도록 도와야 한다. 지식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정서적으로 그 성경이 그들 개인에게 적용되도록 돕되, 결국은 그들의 고집을 꺾고 하나님 안으로 돌아서도록 끌어당겨야 한다. 이러한 끌어당김은 서로 간에 마음의 다리가 놓아지고 친구가 되어야 가능하다. 앞에 말한 유럽에 함께 간 그 형제는 지금도 가끔 놀아달라고 연락을 한다.

선교단체와 교회가 청년들의 시간을 두고 기득권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인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한다. 교회와 선교단체는 생존을 위한 다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다음 세대가 걸린 문제에 대승적으로 한 마음을 품어야 한다.

선교단체에 각 교회의 청년들을 믿고 보내주시길 바란다. 언제나 그랬지만 잃어버린 한 사람, 한 영혼이 귀하다. 효용 가치가 떨어져 보이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한 사람에게 교회와 선교단체가 다함께 통 크게 투자해보면 좋겠다. <끝>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