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⑬ 해외의 만세운동
[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⑬ 해외의 만세운동
  • 김병희 박사(대신대 교수, 서변제일교회)
  • 승인 2019.04.12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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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희 박사(대신대 교수, 서변제일교회)

‘국외 독립운동기지’ 북간도, 강력한 만세시위 전개하다
 

3·1운동의 진원지는 해외였는데 1919년 2월 1일 만주에서 무오독립선언이 발표되었고 이어서 동경 유학생들이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것으로 개시되어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자 국외 동포사회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국외의 3·1운동은 만주, 연해주, 미국 등지에서 전개되었다. 만주에서는 서북간도의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국내로 진공작전을 전개하였고, 연해주에서는 3월 17일 대한국민회의 중심으로 독립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미국에서는 독립청원운동과 더불어 모금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국외의 독립운동기지인 북간도(北間島)는 백두산의 동북쪽으로, 두만강 넘어 연길·화룡·왕청의 3현에 이르는 지역을 말한다. 그러나 조선인들이 이주한 지역은 연길도인 혼춘·액목·돈화·동녕·영안 등의 5현까지 포함된다. 간도는 역사적으로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를 비롯한 서간도와 더불어 한민족의 활동영역에 들어 있던 고토이며 민족문화 발전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던 곳이다.

김병희 박사(대신대 교수, 서변제일교회)
김병희 박사(대신대 교수, 서변제일교회)

이곳에는 1906년부터 캐나다장로회선교부 소속 그리어슨 선교사와 홍순국의 노력으로 예배처소가 마련되었는데, 1908년에는 함북성진대리회에서 김주안 조사를 용정에 파송하여 교회를 돌보게 하였다. 1911년 2월 성진에서 조사로서 활동하던 이동휘가 이 지역에 파송되어 사경회를 인도하고, 이를 계기로 조직된 삼국전도회(三國傳導會)를 중심으로 각처에 전도한 결과 교회들이 크게 부흥하였다.

특히 명동교회와 명동학교에서 민족정신과 독립의식이 강력한 교육을 받은 인물들이 북한, 만주, 시베리아 각처로 흩어져서 교육계, 종교계에서 민족운동의 주도세력으로 활동하였다.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는 북간도 지역에서 모델이 되었다.

북간도지역에 만세시위가 처음 일어난 것은 3월 13일 용정에서였다. 1919년 2월 18일과 20일에 걸쳐 연길 하장리에서 북간도지역의 독립운동가 33인으로 구성된 비밀회합이 열렸는데 이 비밀회의에서 간도 내의 교회와 단체들이 협력해서 자주독립운동에 최선을 다할 것과 각 단체들도 집회를 열어 독립만세를 외치고 용정에서 독립을 선언할 것을 결의하고 연길과 용정의 조선인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간도의 3·1운동은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의 주도로 용정 등지에서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간도의 3·1운동은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의 주도로 용정 등지에서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3월 1일 서울에서 이미 만세시위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2월 7일 용정 명동중학교의 교사 최봉익은 즉시 서울에 가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왔다. 거사를 준비하던 인사들은 더욱 용기를 얻어 3월 8일부터 용정과 국자가를 중심으로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북간도에서도 독립선언식을 결행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조선국민의사부를 중심으로 협의를 거듭한 결과 3월 13일 ‘조선독립축하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대회장에 김영학, 부회장에 배형식 목사 등을 선출했다. 용정 북쪽의 넓은 들판인 서전대야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를 전개한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들은 간도거류조선민족 일동의 이름으로 ‘독립선언포고문’을 작성하였으며, 최봉익이 갖고 온 독립선언서는 용정 캐나다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 지하실에서 청년회 윤준희의 책임 하에 비밀리에 등사 인쇄하면서 본격적인 시위 준비를 실행에 옮겼다. 3월 10일부터 각 사립학교는 휴교령을 내리고 만세시위를 위한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북간도 조선인촌의 서당.
북간도 조선인촌의 서당.

특히 조선국민의사부는 북간도에서 일본 심장부와 같은 일본 총영사관 소재지 용정을 의도적으로 택하여 3월 13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3월 12일 밤 독립선언 서명자들의 이름으로 중화민국 정부와 북경의 외교부·길림성장 앞으로 대한독립에 관한 통첩을 보냈다. 또한 용정중앙교회의 박예헌 목사를 통해 영국덕 선교사에게 사전에 통고하였으며, 캐나다 선교부의 스코트 선교사를 통해 북경주재 미국·영국공사와 상해 외국인 기독교 계통의 전 교회에 통보할 것을 약속 받았다.

3월 13일 그 동안 만세시위운동을 준비한 구춘선 장로, 김약연 목사, 배형식 목사, 강백규 장로, 정재면 전도사, 마진 집사, 신학봉 집사 등 북간도 지역의 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은 민중, 학생, 교인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 바람이 부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전대야에는 3만여 명의 군중이 모여 들었다. 부근 100리 안의 조선인들은 거의 다 모여들어 조선독립축하회 식장의 넓은 뜰을 꽉 메웠다. 정오에 용정 천주교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조선독립축하회가 개최되었다.

연단에 대회 부회장인 배형식 목사가 올라서 개회를 선언하고 이어 대회장 김영학은 ‘독립선언포고문’을 낭독하고 축하회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이어서 연단에 오른 유예균·배형식 목사·김내범 목사 그리고 황지영 여사의 연설이 이어졌다. 특히 유예균이 강한 어조로 군중들의 만세시위를 독려하였고, 군중들은 가슴에 품고 있는 태극기를 들고 흔들면서 만세를 불렸으며 우렁찬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천지를 뒤흔들었다.

용정 3·13만세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명동학교.
용정 3·13만세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명동학교.

큰 태극기가 시위대의 선두를 지키는 가운데 ‘대한독립 정의인도’라 쓴 오장기를 앞세운 명동중학교 학생 악대가 선봉에 섰고, 다른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손춤을 추고 뛰기도 하면서 용정 시내를 향하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는 일본영사관으로 들어가 걸어둔 일장기를 부러뜨리고 더욱 격렬하게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시위대가 오층대 앞을 지날 때에 일제는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맹부덕이 거느린 중국 무장육군으로 하여금 시위대를 저지하게 했다. 맹부덕이 이끄는 군인들은 시위대를 가로 막았고,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면서 군중들의 행진을 저지하였다. 선두에 선 대한독립기는 군인들에게 강제로 빼앗기고 말았다. 군기(軍旗) 공덕흡은 몸싸움 끝에 다시 대한독립기를 빼앗았다. 중국 군인은 무차별적으로 발포를 시작하였고 그 자리에서 공덕흡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으며, 사상자들이 속출하였다. 사상자들은 기독교 제창병원으로 이송하였고,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이날 만세시위로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48명, 수형자 94명이었다. 목숨을 잃은 17명중 3월 17일 먼저 14명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제창병원에서 발인하고, 4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이 기독교식으로 진행되었다. 시신들은 허청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용정 3·13만세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제창병원.
용정 3·13만세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제창병원.

이후 북간도에서는 40여 일 동안 연길현·화룡현·왕청현 등지에서 22회의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총인원 7만1300명이 참여하였다. 이 밖에 훈춘현에서도 3월 16일부터 20일 사이에 현성, 횡부자구, 로황구 등지에서 수백 명이 참석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만세시위의 양상은 평화적인 만세시위에서 적극적인 무장투쟁으로 변모하면서 일본과의 무력충돌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 결과 교회의 피해가 극심했는데, 상해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에 의하면 북간도 4현에서 3469명이 살해되었는데 이 가운데 과반수 이상이 기독교인이었다고 한다.

여러 교역자들과 기독교학교 교사들이 감금되었으며. 예배가 금지되었고, 교회당은 불타고 파괴되었다. 이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만주의 추위와 배고픔, 그리고 나라를 빼앗긴 아픔을 같이 나누며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신앙의 양심으로 들불처럼 일어나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것이다.

주목해야 할 인물/ 간도 대통령 김약연 목사

명동학교 설립, 민족정신 함양 힘써

김약연 목사(사진)는 ‘간도 대통령’이라 불린다. 이상촌을 건설하기 위해 북간도로 이주한 김약연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토지를 사들여 명동촌을 조성하였으며,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겠다는 항심으로 독립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1901년 김약연은 규암재라는 서당을 열어 한학을 가르쳤고, 1908년에는 규암재에 신교육을 실시하는 명동서숙을 설립했다. 명동서숙은 1909년 명동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정재면 선생을 교원으로 초빙했다. 정재면 선생의 부임 조건은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이 요구 조건이 현실화되어, 명동촌에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1910년 명동학교에 3년제 중학과정이 증설되었고 김약연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명동학교는 민족정신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다.

1913년 4월 26일 간도지역 최초의 한인자치기구인 간민회가 창립되었다. 김약연은 회장으로 선출되어 새로 이주해오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간도에 정착할 수 있도록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1920년 2월 김약연은 용정 3·13만세운동에 연루되어 연길 도윤에게 체포되었고, 국자가(연길) 감옥에 수감되어 1922년 2월에 출옥하였다. 옥고를 치르는 동안 무장 항일운동은 사회주의 사상이 가미된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명동학교에서 기독교를 제거하려 하였고, 김약연은 결국 명동학교 문을 닫아야 했다. 이후 그는 목회에 뜻을 두고 1929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한다. 졸업 후 1930년 목사 안수를 받고 명동교회 목사로 시무하면서 은진중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이사장으로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김약연 목사는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교회와 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였고, 신앙의 양심을 따라 조국의 독립을 준비하였다. 그는 광복을 눈앞에 둔 1942년 10월 29일 “내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명동 땅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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