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나는 1957년 경기도 평택 서정리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는 한국전쟁 직후라 누구나 가난했지만 우리 집은 유난히 더 가난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은 피난민이었다. 어릴 적 초등학교에 다닐 때 100원하는 기성회비를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었고, 밥을 마음껏 먹어 본 적도 없었다.

집에서 밥을 굶을 때는 그나마 나았다. 문제는 학교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을 때였다. 그 시절 반찬이야 별 것 없었지만, 그 별 것 아닌 반찬조차 못 싸갈 때가 많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꽁보리밥 도시락을 들고 아이들이 싸온 김치를 같이 먹었다.

가난한 시절 어머니의 기도는 지금도 내게 감사와 회한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어머니 또래의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마음을 여미게 된다.
가난한 시절 어머니의 기도는 지금도 내게 감사와 회한으로 남아있다. 그래서 어머니 또래의 어르신들을 뵐 때마다 마음을 여미게 된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는 3년 내내 신문을 돌렸다. 공부에 취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살림에 공부만 하겠다고 고집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내가 돈을 벌어 등록금을 내야만 했다. 신문 배달은 단순히 배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수금도 해야 했고, 수금한 돈을 신문사 지국에서 일일이 정산도 해야 했다. 그렇게 신문을 돌리고 집에 돌아가면 컴컴한 저녁 8시가 되었다. 얼어 냉 친 쓴 고구마를 밥 삼아 무국과 허연 김치로 배를 채우고 나면 금방 잠이 쏟아졌다. 그 시절 공부는 나에게 꿈같은 이야기였다.

지금도 눈물이 많지만 나는 어릴 적 유난히 눈물이 많았다. 어느 겨울 신문을 돌리던 때였다. 철도 건널목 너머에 이발소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이발소 주인이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다. 신문 값을 한두 달 안 내는 것이 아니라 6달씩이나 버티고 있었다. 신문사 총무는 꼭 수금을 해오라고 날마다 재촉했다. 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 신문 값 주세요.” 주인은 힐끗 한 번 쳐다볼 뿐 본체만체하는 것이었다. “신문 값 주세요. 아저씨~.” 이번에는 제법 큰 소리를 냈다. 그제야 주인은 한 마디 대꾸했다. “지금 바빠! 내일 와!” “안 돼요. 오늘은 꼭 받아오라 했어요.” “알았다니까 내일 오라고!”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일 주실 거면 오늘 주세요.”

내 태도가 꽤 당돌했던 모양이다. 주인이 이발하던 일을 멈추고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누가 그깟 신문 값 떼 먹냐? 이놈아!’라며 욕을 섞어가며 소리소리 질렀다. 나는 주눅이 들어 아무 소리도 못하고 그 욕을 듣고만 있었다. 삐쩍 마른 까까머리에 눈만 반짝거리는 중학생이 불쌍해 보였던지, 머리를 깎던 손님이 “밤늦게까지 신문 배달하는 어린 학생에게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냐?”며 주인을 나무랐다.

그 말에 나는 가슴에 모여 있던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터졌다. 엉엉 울고 있자니 그제야 주인이 내일은 돈을 꼭 주겠다며 오늘은 그냥 돌아가라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서러웠다. 이발소 주인에 대한 미움과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해서 내가 신문 배달을 해야 하는가라는 원망이 뒤섞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돌아가신 엄마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릴 적 나는 엄마와 같이 다니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다. 친구들과 놀다가 멀리서 엄마가 보이기라도 하면 일부러 길을 돌아갈 때도 많았다. 우리 엄마는 멀리서도 얼른 눈에 띄었다. 어릴 적 다친 다리로 평생을 심하게 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그지없다.

그런 우리 엄마는 평생 나를 위해 하루도 쉼 없이 믿음으로 기도해 주셨다. 길이 미끄러워 새벽 기도를 가지 못할 때에는 냉기가 올라오는 작은 방으로 건너가 스티로폼을 깔고 그 위에서 기도하셨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비판하는 기도가 아니었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작은 방에서 우리 엄마는 기도 때마다 많이도 우셨고, 그 울음은 잠자는 중에도 내 귀에 아련하게 들렸다. 엄마의 피 맺힌 기도 때문에 오늘의 내가 이만큼 행복하게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하면 고마움과 죄스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제 울 엄마 천국 가신지 10년이 지났다. 얼마 전 엄마의 산소에 찾아가 “엄마 미안해! 내가 너무 어렸어!”하며 무덤 속에 침묵하고 계시는 엄마에게 눈물로 나의 부족함을 고백했다. 엄마의 기도 소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수록 왜 나에게 더 크게 들려오고 있을까? 내 가슴을 왜 그리도 후려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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