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와 총회역사위원회 주최로 3월 21일 승동교회에서 3·1운동 100주년 기념세미나가 열렸습니다. 본 지면에서는 전체 세미나 일정 중 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의 개회예배 설교, 박용규 교수(총신대) 김남식 교수(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 김효시 교수(광신대)의 강의를 각각 요약 소개합니다. 세미나에 함께 소개된 박창식 목사(총회역사위원장) 신종철 교수(아세아신학대) 김병희 교수(대신대) 등의 강의는 기독신문 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에 연재되고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민족해방정신 승계에 힘써 갑시다

3·1정신은 남과 북 하나되게 하는 공동의 밑거름

개회예배 설교/ 3·1독립운동과 기독교

장차남 목사(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증경총회장)

3·1운동의 바탕엔 기독교 정신과 사상이 깔려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당시로서는 이 운동이 일제의 탄압과 철권 앞에 좌절한 듯 했으나, 그 정신은 일본의 속박 기간 내내 겨레의 마음속에 독립 운동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또한 8·15 광복 후에도 우리 겨레의 기저에 자리 잡은 민족정신이자 개혁의 등불이 된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단과 냉전의 문제를 꼭 풀어야 합니다.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골육의 문제를 구한다’고 한 것과 같은 마음으로 풀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3·1정신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첫째, 민족운동을 통하여 민족의 동질성 안에서 남북을 수용해야 한다고 봅니다. 따라서 외세나 이데올로기보다 주인의식, 공동체 의식을 통한 남북간 민족의 동질성 회복이 긴요합니다. 온건한 민족운동의 확산은 통일의 공감대를 형성케 합니다.

둘째, 민주운동을 통하여 국민의 총체적 역량을 결집해야 합니다. 특히 가속화되고 다원화되고 지구촌이라 일컬어지는 대량 정보사회에서 획일적 통제나 정치 조작이란 불가능한 줄 알고 종교자유와 시장경제를 기축으로 한 민주적 공감대 형성에 힘써야 합니다. 온건과 합리, 경쟁과 대화, 조화와 균형, 자유와 책임, 창의와 선택이 있는 민주사회야말로 3·1운동의 지향점이었다고 봅니다.

셋째, 평화운동을 통하여 폭력이나 억압을 사라지게 하는 동시에 정의와 자유가 공유되게 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도 생명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인권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자유와 더불어 질서의 관념이 있어야 하고, 자연 환경을 보호하고 질병과 빈곤을 추방하며, 폭력과 전쟁이 없는 사회가 되게 해야 합니다. 물론 핵 공포로부터도 벗어나야 합니다.

넷째, 개혁운동을 통하여 항상 3·1정신을 승계하는 입장에 서야 합니다. 부정의, 불평등, 부자유, 부조리한 사회를 극복하고 올바른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도덕과 신의와 책임을 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교회개혁과 더불어 사회개혁의 선도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이방인을 통하여 그들을 압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지도자를 세우사 그들을 압제로부터 해방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성도들과 민족지도자들의 비원에 따라 독립해방을 허락해 주신 줄 알고, 이 정신을 승계토록 힘써야 합니다. 3·1정신이야말로 남과 북을 하나 되게 하는 공동의 기반이며 밑거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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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①/ 기독교와 3·1운동 통한 한국장로교회 역할

한국장로교, 3·1운동의 중추였다

박용규 교수(총신대)
박용규 교수(총신대)

한국장로교는 3·1운동의 준비와 전개와 확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것은 몇 가지 점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첫째, 105인 사건과 3·1운동과의 연계성이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 123명 가운데 98명이 기독교인이었고, 그 중 89명이 장로교인이었다. 89명의 장로교인 중 1명을 제외하고 모두가 서북출신들이었다는데, 이들 가운데 강규찬 선우훈 양전백을 비롯한 상당수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둘째, 서북지역의 장로교들이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때도 연계성을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다. 선우혁 양전백 이승훈이 적극 주도하고, 길선주 변인서 김선두 김동원 이덕환 도인권 김성택이 함께 모여 평양에서 3·1운동을 전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장대현교회 윤성윤을 비롯한 몇몇 의식 있는 이들을 통해 상당한 자금을 확보하고, 숭실대학 숭실중학 숭덕학교 숭의여학교 숭현여학교 등 장로교가 운영하는 평양의 미션스쿨들도 대거 참여했다.

셋째,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지도자 33명의 분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서명자 가운데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김병조,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등 7명이 장로교인이었고, 이갑성과 이명룡을 제외한 5명이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였거나 재학했던 인물이다. 16명의 기독교 서명자 대표가 이승훈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한국장로교는 의심할 바 없이 3·1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3·1운동은 서울, 평양, 전주 세 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났다. 놀랍게도 이 세 곳에서 중요한 발판을 놓은 인물은 장로교인들이었다.

넷째, 평양에서 일어난 3·1운동 진행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평양의 장대현교회, 사창골교회, 산정현교회, 서문외교회, 창동교회, 남문외교회를 비롯한 6개 교회 3000명은 평양숭덕학교에 모여 고종황제 봉도식에 이어 조선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사회를 맡은 사람은 당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7대 총회장 김선두 목사였다. 그날 김 목사는 교우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민족적 위기에 침묵하지 말자고 호소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총회록에 수록된 1919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장로교회의 피해규모는 사망자 41명, 복역자 976명, 태형 928명, 중상자 116명, 집행유예 159명, 방죄 방면 5명, 부상석방 16명, 악형 85명, 상고 중 60명, 교회 파괴 31동 등이었다. 3·1운동으로 가장 큰 참화를 입은 곳은 교회와 교회학교였다. 수원 제암리교회 학살사건, 강서사천교회 학살사건, 정주교회 학살사건, 강계교회 학살사건, 위원교회 학살사건, 서울 십자가사형사건, 북간도 노루바위(獐岩里)교회 및 서간도 각지 교회 학살사건, 정주 오산학교 피소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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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②/ 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

대구와 선산 독립운동 주도하다

김남식 교수(한국장로교사학회장)
김남식 교수(한국장로교사학회장)

1919년 경신학교의 신임교사였던 최재화는 학교 선배인 세브란스 의전의 이갑성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을 받았다. 종로2가의 YMCA에서 만난 이들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고 곧 있을 3·1독립운동의 방향에 대해 논의 하였다. 이갑성은 영남 출신인 최재화에게 대구지방의 독립운동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의기투합한 최재화와 이갑성은 대구 남성정교회(오늘의 대구제일교회) 이만집 목사를 설득하기 위해 세브란스 학생인 이용상과 함께 독립선언서 400매를 가지고 대구로 갔다. 이렇게 하여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8일에 일어났다. 만세운동에는 학교와 교회 그리고 온 민족이 함께 하였다.

대구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최재화는 10일 밤, 대구를 탈출하여 고향 선산으로 갔다. 선산의 독립운동을 또다시 주도하기 위해서이다. 최재화는 선산 지방의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9년 4월 3일에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 후 최재화는 다시 대구에 잠입하여 계성학교 학생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운동을 계획하였다. 그것은 관공리들의 사직을 촉구하는 경고장을 살포하는 일과 일본에 항거하는 의미로 각종 상점들이 폐점하기를 촉구하는 경고장을 작성하여 살포하는 일이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을 ‘최재화 사건’이라고 명명하였다.

최재화는 일본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하여 여러 개의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 와중에도 제2차 최재화 사건으로 불리는 ‘무관학교 생도모집 사건’을 또다시 주도하였다. 결국 최재화는 상주역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상주경찰서 유치장에 갇힌 최재화는 탈출할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꾀병을 부려 유치장을 나와 형사들을 때려눕히고 도망쳤다. 그는 여행증을 입수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에 갔고 거기서 다시 중국 상해로 가, 산동성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자로 살아간다. 그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손길이 너무나 놀라워 인간의 머리로는 측량할 수 없기에 그 역사 앞에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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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③/ 3·1운동과 오방 최흥종 목사

‘최망치’서 민족 지도자로 ‘우뚝’

김효시 교수(광신대)
김효시 교수(광신대)

오방 최흥종 목사는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역사의 시련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분이다. 그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기개를 펼쳐야 할 젊은 시절을 불우하게 보내며 최흥종은 일명 ‘최망치’(무쇠주먹)로 알려진 악명 높은 깡패로 광주를 누비고 다녔다.

그러나 그는 후에 변화된 삶을 살면서 이러한 시대에 침몰되지 않고, 민족의 지도자로 우뚝 서서 조국의 미래를 향한 초석을 굳게 놓는 업적을 이뤄냈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독립운동가로서, 사회의 불우한 이웃을 향한 사회 운동가로서, 또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목회와 선교에 헌신하였다.

3·1독립만세운동이 논의될 때 최흥종과 김철이 광주지역 총책을 맡게 되었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동참할 인사들을 규합하기 위하여 ‘삼합양조장’이라는 명칭의 위장 비밀독서회 인사들과 북문안교회 장로 남궁혁 등에게 협조를 구하였다. 광주의 거사일을 큰 장날인 3월 8일로 정하고 준비하던 중, 최흥종과 김철은 승하한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고 전남지역 만세운동에 뿌려질 독립선언서을 받아 오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러나 3월 5일 서울 학생들의 만세 운동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되자 인력거 안에서 흥분을 참지 못하고 ‘조선독립’이라 쓴 깃발을 휘두르며 ‘만세’를 외치던 최흥종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재판을 받은 결과 3년형을 구형받았으나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르고 출감하였다.

뜻밖의 사건으로 최흥종이 광주의 3·1운동을 주도 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상경하기 이전에 이미 모든 것을 준비했었다. 광주에서는 최흥종이 서울에서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광주만세운동에 대한 모의가 탄로 나지 않을까 염려하였다. 그러나 최흥종은 거사에 대해 발설하지 않았고, 아무 일 없이 광주에서의 만세운동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1920년 6월 13일 최흥종이 대구형무소에서 출소된 후 광주에 오자 유덕동 공원에 환영인파가 가득 찼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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