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만 자극하는 적용없는 설교의 무익함 강조 … 위대한 도구 ‘상상력’ 활용하며 드라마처럼 보여주라

한 가지 중심사상에 집중하며 삶의 변화 촉구하라

강해설교의 아버지 해돈 로빈슨의 설교를 소개합니다. 본 설교는 주로 중년층으로 구성된 교회에 초청되어 했던 설교로서, 미국의 최고 설교자를 소개한 책에 실린 설교입니다. 본문의 흐름을 잘 보여주면서도 한 가지 중심주제가 선명하고 삶으로 촉구하는 것까지 균형 잡힌 강해설교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제목 : 중년에 불어 닥친 다윗왕의 위기(King David’s Midlife Crisis)
●본문 : 사무엘하 11장
●출처 : ‘Ten Great Preachers: Messages and Interviews’에서 부분 발췌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성경에 나오는 지도자 한 사람 다윗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다윗이 왕위에 있은 지 17년 동안 나라는 그칠 줄 모르는 번영을 누렸습니다. 지난 12년 동안 다윗은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은 마치 정오 태양의 세례에 꽃들이 잎을 펼치듯 다윗에게로 향했습니다. 다윗은 영적인 민감성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그는 예루살렘의 왕좌에 앉아 있습니다. 안전하고 자족한 삶을 누렸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47세가 된 왕. 그의 인생이 모두 평탄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든 것이 적지 않았습니다. 왕궁벽에 걸려있는 거대한 청동거울을 볼 때마다 사라져가는 젊음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거칠었던 수염이 이제 부드러워져 갔지요. 머리카락이 힘없이 넘어가고 하나씩 희어져 가는 것을 본 거죠. 이것이 다윗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결혼생활 또한 그렇게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일곱이나 아내를 두었지만 그의 마음을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47세로 접어든 다윗의 삶이 바로 이런 거였죠. 그저 덤덤하게 보였던 그의 인생.

​하나님과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젊은 날 다윗은 하나님을 너무나 가까이 느낀 나머지 마치 하나님을 손으로 만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에 하나님의 흔적이 사라져버린 지도 벌써 오래된 듯 합니다. 다윗은 스스로 위로하기도 했지요. 중년에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정도가 되면 이상주의자가 되기보다 실제론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나을 수 있습니다.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장미꽃을 심는 것보다 먹을 수 있는 감자를 심는 것이 좋은 거나 마찬가지죠.

사무엘하 11장 1절과 2절에서 성경의 기자는 우리를 사월의 두 번째 주에 예루살렘으로 안내합니다. 눈들이 녹았고 들판은 형형색색의 꽃으로 만발했습니다. 왕들이 전쟁에 나가야할 때가 된거죠. ​그러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보니 다윗은 여전히 도시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해가 되는 일이었죠. 다윗은 행정도 해야 했습니다. 통치해야 할 정부가 있고, 서명해야 할 조약도 줄을 이었고, 내각도 돌봐야 했지요.

​다윗은 지금 왕궁 지붕 위에서 오후의 선선한 바람을 맞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름답게 펼쳐진 정원을 바라보았죠. 저 멀리 한 집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여인이 집에서 나와 정원으로 들어갑니다. 목욕을 하려던 참이었죠. 키가 크고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인이 옷을 벗는 것을 보는 다윗. 그녀는 마치 남성잡지 속에 끼어있는 여성사진과도 같았습니다. 다윗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다윗은 그녀에게서 눈을 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욕이 끓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곁에 서있던 하인에게 묻습니다. “저 집이 누구의 집인가? 아, 맞아. 우리아의 집이지. 나의 충직한 30인의 부하 가운데 한 사람. 그의 아내 이름이 무엇이었던가? 맞아, 맞아, 밧세바. 참 영리한 여인이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 지 우리는 자세히 모릅니다. 고대의 역사가는 자세히 말해 주지 않습니다. 사무엘하 11장 4절에 다윗이 그녀를 데려오게 했다는 사실 밖에는 없죠. 밧세바는 다윗에게로 왔고, 다윗은 그녀와 동침했습니다. 몇 주가 흘렀습니다. 다윗은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간결하고도 분명한 메시지였습니다. “제가 아이를 가졌습니다.” 밧세바의 편지였죠. 편지를 읽는 순간 다윗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았죠. 구약성경에 의하면 간음 중에 잡힌 사람은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물론 구약은 왕이든 평민이든 동일하게 적용되었죠. 다윗의 심장이 강렬해지기 시작합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고 손이 차가워집니다. 몇 분 후에 다윗은 다시 침착을 찾았습니다. 어떠한 조치라도 취해야만 했습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밧세바와 동침하게 한 후 모든 것을 은폐하려했습니다. 요압 장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우리아를 전장에서 돌려보내라.”

​다윗은 우리아와 무슨 말을 나눌 것인지 수도 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아, 이렇게 와 줘서 고맙네. 병사들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데 이렇게 집으로 혼자 돌아온 것이 얼마나 낙심되는 일인 지 내가 잘 안다네. 그래, 전쟁에 대해 말해 주게나.”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나서 다윗이 말합니다. “우리아, 자네는 참으로 충직한 부하라네. 휴식이 필요할테니 잠시 집으로 돌아가 쉬게나. 내가 음식을 보내리니 밧세바와 함께 먹고 밤을 보내게나.” 성경 저자는 9절에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다윗이 그를 불러들입니다. “우리아, 이게 어찌된 일인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니?” 우리아가 말합니다.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다윗은 군대 장관 요압에게 편지를 씁니다. “우리아를 전투에 앞세우고 후퇴하여 그를 죽게 하라.” 우리아는 살생부를 들고 전쟁터로 향합니다. 며칠 후에 요압 장수가 전갈을 보내옵니다. “왕이여, 우리 군대가 라바성 가까이 도착했습니다. 너무나 가까이 이른 나머지 궁수의 활에 몇몇 군사들이 죽었습니다. 헷사람 우리아도 죽었습니다.” 며칠간 남편의 죽음을 애도한 후 다윗과 밧세바는 결혼을 올립니다. 몇 달 후에 아이가 태어납니다. 다윗은 완벽하게 은폐했습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고대사람들도 오늘날 사람들처럼 열달이라는 숫자는 똑같이 셀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확실히 알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보내십니다. ​나단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왕이여, 왕궁에 거대한 부자가 살고 있습니다. 양과 소가 심히 많습니다. 반면 길 건너편에 가난한 한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암양새끼 한 마리밖에 없었죠. 얼마나 그 양새끼가 귀한 지 마치 그 집에 딸처럼 되었습니다. 행인이 부자의 집에 찾아오자 부자는 자신의 양을 잡지 않고 길 건너 가난한 이웃의 암양을 잡았나이다.” 나단이 채 끝내기도 전에 다윗의 눈동자에 불이 튀었습니다. 다윗이 소리칩니다. “이 일을 행한 자는 사형에 처해야 하리라. 빼앗은 것의 네 배나 갚아야 하리라.” 다윗은 남의 양을 훔치는 것에는 양심이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아내를 훔치는 일에는 양심이 죽었던 것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말합니다. “왕이여,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단이 혹시 농담을 하고 있지는 않는 지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나단은 웃고 있지 않았습니다. 나단은 하나님께서 지켜보신 모든 것을 다윗에게 들려줍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악을 고백합니다. 자기연민도, 자기합리화도, 어떠한 변명도 없이 고백합니다. “밧세바와 범죄하였고 우리아에 대하여 죄를 얻었노라. 내가 하나님께 죄를 얻었나이다.”

​​요한 낙스는 위대한 개혁가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가 50대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스코틀랜드를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도 40대에 평범한 인생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일기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붙들리라.” 이것이 바로 중년 때 우리가 해야 할 결단입니다. 여러분은 젊은 날 헌신을 결단했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중년에 이르러 다시 한 번 결단해야 할 헌신이 있습니다. 인생의 기반이 잡히고 안락함을 느낄 때, 모든 것이 성공적으로 보일 때 여러분은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의 어느 때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면 심연의 낭떠러지를 걷는다는 사실을. 중년 때 인생이 평탄해 보일 때 여러분은 다시 한 번 결단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을 붙잡으리라.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한 번 나에게 불꽃을 피우게 하시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다시 한 번 불태우시든지 혹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붙잡으리라.

상상력과 함께 드라마처럼 보여주는 설교

해돈 로빈슨의 설교는 스토리의 능력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설교 첫 시작부터 이야기를 시작하여 본문을 여행하게 하고 삶으로 적용하는 모든 과정까지 한 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듣는 듯 합니다. 다윗에 대한 상황묘사는 마치 우리 눈앞에 이스라엘 왕궁에서 다윗과 함께 걸으며 다윗의 눈빛을 보는 듯 하게 합니다. 로빈슨 교수는 본문의 의미를 그대로 드러내는 성경적 설교를 강조하지만 내러티브 형식의 전달로 청중과의 교감을 보여주는 탁월한 모델입니다.

로빈슨의 스토리 전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설교의 중심 내용은 본문에 근거하지만 설교의 구성은 상상력이라는 위대한 도구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왜곡시키지 않고 더욱 드러낼 수만 있다면 상상력은 흑백사진을 컬러사진으로 만드는 위대한 힘입니다.

한 가지 중심사상에 집중하는 설교

해돈 로빈슨의 설교학에서 가장 핵심은 본문을 통해 찾아낸 한 가지 중심사상에 집중하는 설교입니다. 로빈슨 교수는 오늘 설교를 소개하는 인터뷰에서 설교의 중심사상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타락의 낭떠러지를 걷게 됩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을 때 왕으로서나 한 사람으로서나 계속적인 범죄로 치닫는 모습에서 중년의 위기가 무엇 때문에 오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적용

해돈 로빈슨은 적용이 없는 설교는 진정한 의미의 설교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적용이 없는 설교는 지성을 자극할 뿐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설교의 목적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에서 로빈슨은 모든 삶이 무덤덤해지는 중년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사명을 가슴에 새기는 것이라 강조합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민감하게 동행할 때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로빈슨의 오늘 설교는 마지막에서 결론을 보여주는 귀납적 설교의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귀납적 설교의 요체는 청중과 함께 본문을 여행하여 청중이 자연스럽게 결론에 이르도록 돕는 것입니다. 최근 설교학자들이 보여주는 귀납적 설교는 결론을 맺지 말고 적용하지 말 것을 강조하지만 성경의 진리를 믿고 전하는 설교자들은 반드시 결론을 맺고 삶으로 적용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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