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장로교회가 핵심 역할, ‘애국애족 종교’ 증명하다

평양 장로교회가 핵심 역할, ‘애국애족 종교’ 증명하다
 

국내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곳은 서울과 평양이었다. 서울은 천도교가 독립운동 계획과 추진의 선두에 서 있었고, 평양은 기독교가 중심적 역할을 감당하였다. 이북에는 미국북장로회 소속 교회가 대부분이었고, 감리교회도 있었지만 장로회에 비해 소수였다. 때문에 이북 독립운동의 선두에는 장로교회가 서 있었다.

3·1운동 당시 한반도 이북지역(황해, 평남, 평북, 함남, 함북)이었던 현재의 북한은 이남의 중부지역(서울, 경기, 충남, 충북, 강원)과 남부지역(전남, 전북, 경남, 경북) 못지않게 만세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됐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68년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발생한 전체 1180회의 만세시위 중 이북지역에서 발생한 만세시위는 440회로 약 37%를 차지한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발표한 1918년 통계에 따르면, 장로교회의 교세는 전국 3154개 교회 중 1896개로 60.1%나 차지할 정도였다.

지역적으로는 경북이 295개의 장로교회를 보유해 1위를 기록했고, 평남이 273개로 2위, 평북이 241개로 3위, 경남이 235개로 4위, 황해가 229개로 5위, 그리고 전남이 154개로 6위에 각각 올랐다. 이 통계는 3·1운동 당시 장로교회가 이북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부흥 성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미국감리회의 경우는 중부지역과 북부지역이 비슷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1. 평양 기독교인들의 3·1운동 준비

이북의 기독교가 3·1운동을 주도한 데는 선우혁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선우혁은 장로교인이었는데,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고초를 당한 후 중국으로 망명했다가 상해 신한청년단 발기인이 된 인물이다.

상해 신한청년단은 1918년 8월 여운형을 중심으로 김규식 김철 서병호 선우혁 조동호 문일평 정인보 신규식 신채호 조용은 장덕수 등이 발기인이 되어 결성한 단체이다. 핵심 인물인 여운형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한 후 졸업하지 않고 중퇴하였지만, 장로교회 전도사로 활동했던 적이 있었으니 그 역시 장로회 소속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다.

신한청년단은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 11월 11일 종결되고, 1919년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한 후 한국인 대표를 파리에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의사를 세계에 알릴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여운형은 당원회의를 개최하여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하기로 했고, 국내에는 선우혁 김철 서병호 등을 파견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로 했다.

전남 함평 출신인 김철은 손병희를 만나 독립자금 지원을 약속 받고 상해로 돌아갔고, 서경조 목사의 차남이며 신한청년단 당수였던 서병호는 요원간의 연락과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활동했으며, 선우혁은 평양을 중심으로 북부지역 활동을 담당하였다.

독립운동 밀지를 받고 1919년 2월 입국한 선우혁은 양전백 목사, 이승훈 장로, 그리고 길선주 목사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어서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송호동교회 김성탁 목사, 장대현교회 변린서 목사, 남감리교 도인권 목사, 장대현교회 이덕환 장로, 산정현교회 김동원 장로, 장대현교회 윤원삼 집사, 남문밖교회 윤성운 집사, 그리고 평양예수교서원 총무 안세환 등과도 만나 독립운동과 자금 모금에 대해 논의하고 상해로 돌아갔다.

❶북한의 만세운동은 기독교, 그 중에서도 장로교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❷일제의 조작으로 발생한 105인 사건은 훗날 3·1운동의 서곡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사진은 105인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체포되는 애국지사들의 모습. ❸❹함흥과 해주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를 묘사한 탑골공원의 부조.
❶북한의 만세운동은 기독교, 그 중에서도 장로교회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❷일제의 조작으로 발생한 105인 사건은 훗날 3·1운동의 서곡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사진은 105인 사건의 주동자로 몰려 체포되는 애국지사들의 모습. ❸❹함흥과 해주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를 묘사한 탑골공원의 부조.

2. 이북 각 도별 3·1운동

■황해도
황해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재령 등 17개 지역이었다. 1919년경 황해도의 기독교인은 3만2000여 명이었고, 천도교인은 8000여 명이었다. 장로교는 재령 신천 안악 은율 장연에서, 감리회는 해주 옹진 연백 평산에서 큰 교세를 이루고 있었다.

황해도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해주이며, 시위가 가장 치열했던 곳은 수안이었다. 해주는 당초 3월 1일에 독립만세운동을 시작하려했으나, 사전 검속 때문에 3월 2일에 일어났다. 수안에서도 시차를 두고 3월 2일에 일어났다. 한국 측 통계에 따르면 황해도 3·1운동 횟수는 115회, 참여인원은 9만 2670명, 사망자 수는 238명, 부상자 수는 414명, 체포자 수는 4218명이었다.

■평안남도
평남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곳은 평양 등 16개 지역이었다. 평남에서 기독교가 가장 왕성하게 뿌리내리고 있던 곳은 평양 안주 진남포였다. 당시 이 세 곳의 교회 수는 265개로 전국의 10.6%에 해당된다.

가장 먼저 만세시위를 한 곳은 평양이다. 서울과 같은 3월 1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고, 기독교인과 시민 및 학생 5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유혈사태는 성천읍에서 시작되었고, 최대의 참극은 맹산에서 발생했다. 한국 측 통계에 따르면 만세운동 횟수는 104회, 참여인원은 17만 6270명, 사망자 수는 1093명, 부상자 수는 2167명, 체포자 수는 6836명이었다.

■평안북도
평북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신의주 등 14개 지역이었다. 평북은 중국과 인접해 있고, 고려문 등을 통해 대륙과의 문화적 교류가 가장 활발하였던 곳이다. 이러한 지리적 여건에 의해 평북은 1919년 조선에서 가장 외국인 거주자가 많은(조선 전체 외국인 거주자 1만9780명 중 24%인 4754명이 평북에 거주) 지역이었다. 한글로 번역된 로스성경이 1887년 발행되었을 때 그 성경이 가장 먼저 보급된 곳이 평북이었고, 조선의 최초 교회가 설립된 곳도 평북 소래이다.

삼일운동 당시 전국 장로회교회의 26.6%가 평북에 세워져 있었고, 평북의 장로교회 수는 357개로 도내 전체 교회 중 91.5%를 차지하였고, 나머지는 미감리회 소속 교회였다.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이승훈(정주), 양전백(선천), 이명룡(정주), 유여대(의주), 김병조(정주)가 평북 출신의 기독교인이었다. 105인 사건의 불씨가 된 안악사건이 1910년에 평북 선천에서 일어났고, 3·1만세운동 시위 횟수는 211회로 이북지역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다. 참가인원 또한 33만8400명으로 서울 다음으로 많았다.

■함경남도
함남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원산 등 13개 지역이었다. 전국에서 면적이 가장 넓고 인구밀도가 가장 낮았던 함경도는 빈부격차와 신분격차가 거의 없는 지역이었다. 산악이 많아 경작지가 부족했고, 날씨도 매서운 겨울이 길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근대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함경도는 당시 교육정책인 3면 1교 제도를 뛰어 넘어, 1면 3교 제도를 시행하며 기독교를 수용하여 발전된 근대교육을 받고자 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함남의 3·1운동은 기독교계 주도로 가장 먼저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원산 남촌동감리교회 정춘수 목사가 중앙과의 연락을 담당하였고, 3월 1일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은 남촌동감리교회 두 전도사와 광석동교회 이순영 장로가 주도했다. 함남에서의 만세운동 횟수는 63회, 참여 인원은 4만2450명, 사망자 수는 135명, 부상자 수는 620명, 체포자 수는 6166명이었다. 특히 함남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격렬했고, 투쟁적이었다.

■함경북도
함북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청진 등 10개 지역이었다. 함북은 지리적으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만주에 맞닿아 있어 서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었다. 함북은 캐나다장로회 선교구역이어서, 1918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교회 수 42개처가 모두 장로회였다. 장로회는 성진 회령 청진에서 교세가 강했다.

함북 3·1운동은 3월 10일 성진과 학중에서 기독교인 주도로 시작되었고, 천도교가 합세하였다. 함북 3·1운동 횟수는 38회, 참여인원은 1만7400명, 부상자 수 47명, 체포자 수 49명이었다. 함북에서 3·1운동 횟수가 비교적 적었던 것은 나남에 일본 19사단 사령부가 주둔해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김호욱 교수광신대학교 역사신학기독교향토연구소 소장
김호욱 교수광신대학교 역사신학기독교향토연구소 소장

이북의 3·1운동은 기독교 그 중에서도 장로교회가 주도했고, 평양이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이북의 3·1운동으로 수감된 전체 인원은 1919년 5월 10일 기준으로 3572명이었고, 그 중 기독교인이 1031명이었다. 특히 평양감옥에 수감된 기독교인 수는 403명으로, 전체 기독교인 수감자의 약 40%를 차지하였다.

이북의 3·1운동은 선우혁이 평양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주동하였고, 이승훈이 이북전역에서 장감연합의 운동으로 확대하는 공헌을 했다. 만세운동을 통하여 기독교는 조선의 근대화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애국 애족하는 종교임을 만천하에 증명하였다.

주목해야 할 인물/ 오산학교의 남강 이승훈

민족대표 33인 활약 … 만세운동 확산에 큰 공헌

이승훈은 이북 3·1운동이 당시 기독교계 두 중심축이었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 연합으로 전개되도록 성사시키고, 만세운동이 이북 전역으로 확대되도록 공헌한 인물이다.

이승훈은 양전백 목사, 유여대 목사, 김병조 목사, 이명룡 장로 등에게 천도교의 서울 활동과 민족대연합운동을 제안해 온 내용을 설명하였다. 또한 이승훈이 감리교 손정도 목사를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자, 손 목사가 같은 감리교회 소속 평양 남산현교회 신홍식 목사에게 이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감리교회도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동참하게 됐다.

이승훈은 1864년 평북 정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모친은 그가 2세 때 세상을 떠났기에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편부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친마저 사망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1874년(10세) 유기상(鍮器商) 점원 일을 하다가 외교원 겸 수금원이 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상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보부상으로 돈을 벌어 정주읍 근처 납청정(納淸亭)에서 유기점 사업을 시작했고 평양에도 지점을 설치하였다. 재정이 넉넉해지자 1887년 유기공장을 경영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1894년의 청일전쟁으로 상점과 공장이 잿더미가 되었고, 그 후 재건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사업이 다시 망하여 낙향했다.

고향에서 지내던 중 1907년 7월 평양에서 안창호의 ‘교육진흥론’ 강연을 듣고 민족의식이 고취되어 금연, 금주를 결심하였고, 단발을 한 후 안창호가 조직한 신민회 회원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인 오산학교를 개교하고 교장이 되어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던 중,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1911년 2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911년 가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이승훈은 유동열 윤치호 양기탁 안태국 임치정 등 신민회 간부와 600여 명의 애국지사와 함께 주모자로 지목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 1912년 10월 10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5년 가출옥했다.

그는 출옥하자 곧바로 세례를 받고 장로로 장립되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이며, 광주북문안교회 전도사였으며, 전남 광주 3·1운동 주동자인 최흥종이 당시 장로 신분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고 있었으니 두 사람은 친분을 가지며 독립운동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음이 분명해 보인다.

이승훈은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 되어 종로서에 구속되었다가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1922년 가출옥해 오산학교로 돌아와 학교 경영에 힘쓰던 중, 1924년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등으로 1년 동안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온 그는 죽기 직전에 자신의 유골을 생리학 표본으로 만들어달라고 유언하였으나, 일제가 허락하지 않아 오산에 안장되었다. 이승훈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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