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ㆍ역사위 세미나...한국교회 신뢰 회복과 사회적 역할 강조

2·8독립선언을 주도한 기독청년들과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의 기독교인, 그리고 3·1운동 직후 일제에 의해 장로교회 교인 41명이 사망하고 976명이 복역했으며 교회 31동이 파괴됐다.

역사의 기록만 확인해도 100년 전 한국교회는 3·1운동에 투신하며 민족 해방에 앞장섰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가. 또한 풍전등화와 같던 시대에 민족의 희망이 됐던 선진들처럼 교회가 사회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가. 3·1운동 100주년 기념세미나에서 한국교회가 3·1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의 미래에 기여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총회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위원장:김종혁 목사)와 총회역사위원회(위원장:박창식 목사)가 공동주최한 ‘한국 기독교와 3·1운동 100주년 기념세미나’가 3월 21일 승동교회(최영태 목사)에서 개최됐다. 지난 2월 24일 드린 기념감사예배에 이은 3·1운동 100주년 관련 총회의 두 번째 공식행사다.

기념세미나에는 증경총회장 장차남 목사, 총회서기이자 총회3·1운동100주년기념사업위원장 김종혁 목사, 총회역사위원장 박창식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와 성도 100여 명이 참석했다. 아울러 이날 세미나는 3·1운동의 본거지 중 하나인 승동교회에서 열려 그 의미를 더했다.

개회예배는 김종혁 목사 사회, 총회회계 이대봉 장로 기도, 장차남 목사 설교, 총회부서기 정창수 목사와 총신운영이사장 송귀옥 목사 축사, 총회회의록서기 진용훈 목사 광고, 총회역사위원장 박창식 목사 축도 순으로 진행됐다.

‘삼일운동과 기독교’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한 장차남 목사는 “3·1운동은 기독교 정신과 사상이 바탕에 깔린 민족독립운동이자 비폭력평화운동이었다”면서, “한국교회가 3·1정신을 계승하여 나라와 민족이 겪고 있는 위중한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장차남 목사는 한국교회의 실천사항으로 △민족운동 △민주운동 △평화운동 △개혁운동을 언급하며, 특히 “3·1정신이야말로 남과 북을 하나 되게 하는 공동의 기반이며 밑거름이 될 줄 확신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한국교회 “민족 위한 책임의식 회복해야”

이어 박용규 교수(총신대)의 ‘3·1독립만세운동과 한국장로교’, 김남식 박사(한국장로교사학회 회장)의 ‘백은 최재화 목사와 독립운동’, 김효시 교수(광신대)의 ‘3·1운동과 오방 최흥종 목사’, 박창식 목사(달서교회)의 ‘영남지역 기독교계 3·1운동사 연구’, 신종철 교수(아신대) ‘호남지역 3·1운동사 연구’, 김병희 교수(대신대)의 ‘북간도지역 기독교계 3·1운동사 연구’ 순으로 발제가 진행됐다.

첫 번째 강사로 등단한 박용규 교수는 한국 기독교가 3·1운동을 주도한 사실이 알려진 반면, 3·1운동과 한국 장로교의 연관성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는 “3·1운동 민족대표 33명 중 이승훈 길선주 양전백 김병조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7인이 장로교인이었다”면서, 또한 “3·1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됐던 서울 평양 정주의 거사를 장로교인들이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함께 총회록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부터 6월 12일까지 장로교 총회의 피해는 사망자 41명 복역자 976명 교회 파괴 31동 등으로 3·1운동 이후 가장 큰 참화를 입은 곳은 교회와 교회학교인 것으로 나타났다.

박 교수는 “한국 장로교 목회자와 성도들은 민족운동의 선구자이자 일제의 혹독한 식민통치 속에서도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며 사회와 민족을 선도했다”면서, “오늘날 한국 장로교인들이 3·1정신을 계승하여 이 시대에 민족적 책임의식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립운동가이자 교회지도자였던 최재화 목사와 최흥종 목사의 삶도 조명했다. 대구의 3·1운동을 주도한 최재화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하며 교회재건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아울러 그는 대구 최초의 기독대학 계명대학교를 설립했고, 대신대학교 설립에도 관여했다.

김남식 박사는 “최재화 목사는 이 땅의 선각자로서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을 뿐 아니라 목회와 교육 등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시도했다”며, “그가 민족을 위해 헌신한 발자취는 세월의 그늘 속에서도 더 귀하게 빛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흥종 목사는 젊은 시절 일명 최망치로 불린 광주지역 깡패였으나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며 독립운동가와 사회운동가로 투신했다. 그는 서울 3·1운동에서 체포되어 정작 3월 10일 광주 3·1운동에 참여하지 못하지만, 광주지역 3·1운동의 기초를 닦은 총책을 맡았다.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사업회장 최철 회장 또한 “최흥종 목사를 빼고 광주의 3·1운동을 논할 수 없다”고 밝힐 정도다.

김효시 목사는 “3·1운동 당시에 못지않게 혼탁한 오늘날 최흥종 목사의 삶은 이정표가 된다”면서, “기독인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민족평화와 세계평화의 비전을 새롭게 해야 할 것”이라고 당부했다.

이날 기념세미나를 끝으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총회가 마련한 모든 공식행사가 마무리됐다. 하지만 총회는 장차남 목사를 비롯한 강사들의 발제처럼 3·1정신을 계승하고 다시금 민족과 동행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총회역사위원장 박창식 목사는 “100년 전 당시 기독교인은 1.5%에 불과했지만 기독교가 신뢰 받는 종교였기에 3·1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반면 오늘날 기독교인은 인구의 20%나 되지만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면서,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한국교회와 총회가 사회적 신뢰 회복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사회를 선도할 수 있고, 나아가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선한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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