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문 대표(다타문화연구소, 전 요르단 선교사)

김동문 대표(다타문화연구소, 전 요르단 선교사)
김동문 대표(다타문화연구소, 전 요르단 선교사)

지난 3월 15일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의 이슬람사원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백인우월주의로 무장한 범인의 총격테러에 무슬림들이 혐오범죄의 희생자가 됐다.

이번 참사는 명백한 총격테러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범인을 테러범으로 표현하는 경우를 보기 힘들다. 테러라고 규정하지 않고,‘총격 사건’ 또는 ‘총기난사 사건’으로 서술할 뿐이다. 한 백인의 일탈적 행동으로 묘사를 하는 경향이 강하다.

만일 범인이 유색 인종이거나 이민자 또는 무슬림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혐오는 증폭되었을 것이다. 이번 참사의 피해자는 모두 무슬림이다. 그럼에도 무슬림을 잠재적인 위협 또는 가해자로 몰아가며 혐오를 발설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이번 사건의 바탕에는 점차 가중되는 백인우월주의, 유색인종혐오주의, 이민자혐오주의, 무슬림혐오주의가 뒤섞여 있다. 사실 무슬림들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혐오를 받고 있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혐오주의가 뉴질랜드처럼 백인의 나라에만 존재할까. 뉴질랜드와 유럽 미국 한국 할 것 없이, 이주 이민자 무슬림들은 혐오를 안고 살아간다. 이슬람사원은 유색인종, 이민자, 무슬림이라는 개인에게 덧씌울 수 있는 모든 혐오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모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번 테러사건의 희생자들은 인종과 출신국가도 다양하다. 파키스탄, 인도,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아프가니스탄, 팔레스타인,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등이었다.

고통스러운 테러사건을 마주하면서 저 멀리, 그리고 우리 가까이 있는 무슬림 이웃이 떠올랐다. 테러 사건이 발생하면 그 이웃들은 가해자의 종교에 주목한다. 범인이 무슬림이라면 혹시나 무슬림 혐오가 더욱 거세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한다. 가해자가 무슬림이 아닌 것이 알려져야 안도감을 내쉰다.

특정 조건을 앞세워서 표출하는 혐오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악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 병폐로 자리 잡은 지역감정 역시 일종의 인종혐오다. 그 최대치가 유색인종혐오일 수 있다. 최근 제주 난민 사건에서 보듯, 한국 사회는 이미 외국인혐오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교회 안팎의 이슬람포비아 역시 심각한 상황이다. 이런 외국인혐오와 이슬람포비아는 근거 있는 비판이나 반대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가짜뉴스에 기반한 다소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두려움과 공포에 바탕을 두고, 부정적인 감정을 강화시킨다. 왜 유색인종, 이민자, 무슬림을 한 덩어리로 간주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중 다수는 배제와 혐오를 겪어봤을 것이다. 그것이 지역차별이나 학벌에 따른 차별이든, 집안으로 인한 것이든, 우리는 모두 다양한 종류의 차별과 적대감의 피해자였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태어날 때 주어진 조건으로 차별을 받을 때 느끼는 그 감정은 참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 중 다수는 나그네, 뜨내기였다. 우리도 이주자였고 이민자였으며 난민이었다. 기독교인 중 다수도 날 때부터 기독교인은 아니었다. 기독교 바깥의 세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기독교인이 된 것뿐이다. 태어날 때 주어진 조건의 하나인 인종, 지역, 종교에 따른 차별은 이런 점에서 멀리해야 할 것이다.

뉴질랜드 총격테러사건을 접한 지금, 다시 우리 안의 혐오를 생각한다. 교회 안팎의 혐오를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우리에게 질문한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에 가득한, 나그네를 환대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마음에 나와 우리는 둔감해진 것인가? 나는 이웃을 같은 인종, 같은 지역, 같은 종교, 같은 교단, 같은 교회를 공유하는 존재로 한정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을 나의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의 답이 우리의 현재를 드러낼 것이다. 우리가 혐오하고 싸워야 할 것은 극단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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