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⑪ 영남지역 만세운동
[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⑪ 영남지역 만세운동
  • 박창식 목사
  • 승인 2019.03.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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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 시작된 만세 함성, 부산 의성 영덕 등 관통하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노래 <동무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다. 어떻게 푸른 담쟁이를 뜻하는 청라언덕이 대구에 있게 되었을까? 구한말 선교사들이 대구에 선교기지를 세우면서 심은 청라가 바로 대구의 상징이 된 것이다.

청라언덕을 따라 양쪽으로 태극기가 사시사철 휘날리는 길이 있는데 바로 대구 3·1운동길이다. 한 해 수만 명이 찾아오는 이곳은 이제 전국적인 명소가 되었다. 하지만 100년 전 그곳은 일본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만세운동에 나선 계성학교와 신명여학교 그리고 대구성경학교 학생들이 소나무 숲 사이를 헤집고 다니며 숨 가쁜 달음질을 하던 항쟁의 장소였다.

대구의 3·1만세운동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이 1919년 2월 24일에 대구를 찾아 남성정교회(현 대구제일교회)의 이만집 목사와 이상백, 계성학교 교사인 백남채를 만나서 만세운동을 논의하면서 시작되었다.

이갑성은 대구 출신으로 선교사들을 통하여 기독교에 입문한 후에, 대구선교기지에서 일하고 병원에서 공부하던 중 추천을 받아 서울의 경신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 그는 세브란스병원 약제실의 총책임자로 있었는데 영남지방 3·1운동의 산파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로부터 시작된 만세운동 논의에 남성정교회와 남산교회, 신정교회(현 대구서문교회) 성도들과 계성학교, 신명여학교, 그리고 대구고보(현 경북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뜻을 같이하였다.

1919년 3월 8일 오후 2시 대구의 큰 장터에는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학생들이 손수 그린 태극기를 가슴에 품고 하나 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는 이미 일본 경찰이 만세운동의 낌새를 눈치 채고 있던 차라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남산교회 김태련 조사는 큰 장 어귀의 소금집 앞에 있던 소달구지를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올라 품속에 감췄던 독립선언서를 꺼내 큰 소리로 낭독하기 시작하였다. 장문의 선언서를 다 읽을 수 없어서 마지막 공약 3장을 읽고 있을 때 일본 경찰이 그를 끌어내려 마구 짓밟았다.

그때 다시 이만집 목사가 뛰어올라 “동포 여러분! 지금이야 말로 우리나라가 독립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입니다. 우리 다함께 독립만세를 외칩시다!”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여들었던 모든 군중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했한 브루언(H. M. Bruen·한국명 부해리) 선교사는 “군중들은 귀가 먹을 만큼 큰 소리로 ‘만세’를 외치더니 줄을 맞추어 시내로 행진하기 시작했다”고 당시의 생생한 상황을 기록으로 전하였다. 만세행렬이 시내로 진행하면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시위 군중은 1000여 명을 능가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 제80연대의 1개 소대와 쇠갈퀴를 소지한 의용소방대 및 경찰이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기 시작했다. 앞장서서 만세를 지휘하던 김태련 조사는 쇠갈퀴에 얻어맞아 실신했는데, 진압대는 이미 실신한 그를 하수구에 처넣고 짓밟았다. 이 장면을 목격한 그의 장남 김용해(당시 24세)는 온 몸으로 아버지에 대한 구타를 막다가 그 또한 일본 경찰이 휘두르는 몽둥이세례를 받고 하수구에 처박혀 치명상을 입었다.

첫날 만세운동으로 157명이 체포되었고, 그 중에 76명이 재판에 회부되어 형을 받았는데 이들 가운데 53명이 기독교계 인물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치명상을 입고 수감되었던 김용해는 이후 계속된 구타와 고문으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3월 27일에 가출옥됐다. 그리고 이틀 후인 29일에 결국 순국하고 말았다. 현재 그는 아버지와 나란히 대구의 신암선열공원에 누워 있다.

❶대구 만세운동이 시작된 청라언덕의 3·1만세운동길 풍경. ❷대구 3·1운동발원지 표지석. ❸영덕 만세운동의 후예들이 횃불을 들고 당시의 의거를 재현하고 있다. ❹영덕군 영해면에 세워진 독립만세운동 기념탑. ❺쌍계교회에 모인 의성지역 성도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 ❻의성군 비안면 서부리에 건립된 3·1운동 기념탑. ❼영남지역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기독인들의 묘비. 위쪽이 영덕 김세영, 아래쪽이 대구 김용해의 비석이다. ❽대구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
❶대구 만세운동이 시작된 청라언덕의 3·1만세운동길 풍경. ❷대구 3·1운동발원지 표지석. ❸영덕 만세운동의 후예들이 횃불을 들고 당시의 의거를 재현하고 있다. ❹영덕군 영해면에 세워진 독립만세운동 기념탑. ❺쌍계교회에 모인 의성지역 성도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모습. ❻의성군 비안면 서부리에 건립된 3·1운동 기념탑. ❼영남지역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기독인들의 묘비. 위쪽이 영덕 김세영, 아래쪽이 대구 김용해의 비석이다. ❽대구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인 남산교회 조사 김태련.

부산 일신여학교의 뒤늦은 졸업식
대구의 만세운동은 3월 11일 항도 부산으로 번졌다. 부산에도 역시 서울에서 3월 2~3일 경에 기독교계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고, 경성학생단의 이름으로 시내 각 학교에까지 전달되었다.

이 일에 가장 먼저 뛰어든 사람들은 호주장로교선교부가 설립한 부산진의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이었다.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은 11명의 학생들과 함께 비밀리에 벽장 속에 숨어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당시 일신여학교 학생이었던 김반수는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소문이 퍼지자, 어머니가 혼수감으로 장만해 둔 옥양목을 몰래 기숙사로 가지고 와서 창문을 이불로 가리고 옥양목에 물감을 칠해 태극기를 만들었다고 회고한다.

11일 밤에 교사와 학생들은 기숙사를 뛰쳐나와 좌천동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고, 이어 범물동으로 진출하면서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된 이들 어린 여학생들은 용수(죄수들의 얼굴을 가리는 기구)를 머리에 쓰고 재판정에 나갔다. 판사의 물음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찾기 위하여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불렀다”고 또렷이 대답하였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교사 주경애와 박시연은 징역 1년을, 학생들은 6개월 형을 언도받았다. 1919년 3월에 제7회 졸업식이 거행될 예정이었지만 김반수, 심순의, 김봉애, 김복선 등 졸업생들은 주경애, 박시연 선생님의 출옥을 기다렸다가 이듬해 1920년 봄에서야 두 교사와 함께 뒤늦게 8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마산에서도 일신여학교의 영향을 받아 3월 21일 구마산 장터의 시위로 시작하여 31일까지 3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마산의 운동 역시 기독교계를 통해 서울과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으며 준비됐다.

마산의 독립선언서는 두 경로로 전달됐다. 3월 2일에 세브란스의전생인 이용상이 이갑성에게서 받은 400매 중 200매를 창신학교 교사 임학찬에게 전달했다. 동시에 세브란스의전생 배동석도 선언서를 의신여학교 교사 박순천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하여 독립운동 준비는 교회지도자들과 기독교계 학교인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교사와 학생들 중심으로 진행됐다.

3월 21일 마산의 첫 시위로 50명이 검거되었으나, 마산의 최고 지사이자 기독교계 유지였던 이승규 장로의 보증으로 대부분 석방됐다. 일부는 4개월에서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복역했다. 김용환은 1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했고, 창신학교 고등과 학생들은 대구복심법원의 결정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상소 장로는 배후 조종 협의로 대구복심에서 다시 서울고등법원으로 이관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의성의 지속적인 만세운동
대구의 3월 8일 만세운동은 주변 여러 지역의 만세운동을 촉발하였다. 의성군 비안면에 위치한 괴산동교회 조사인 김원휘는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가던 길에 3월 3일 평양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왔다.

그는 쌍계동교회 목사 박영화에게 감격스러운 상황을 전하면서 의성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였다. 여기에 대구 만세운동을 목격한 괴산동교회 박우완 영수와 계성학교 학생인 박상동이 가담하면서 모의가 구체화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의성의 3·1운동은 3월 12일부터 4월 초까지 쌍계동, 대사동, 괴산동, 대리동, 송내동의 여러 교회들이 중심이 되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3월 15일 주일 낮 예배를 마치고 대사동교회의 영수 이종출 김옥돈, 집사 이양준 이북술 등이 교회당에서 의논하고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얻은 즉시 뒷산으로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안평면 석탑동, 소문면 대리동, 점곡면 송내동, 봉양면 도리원, 신평면 덕봉동 등 전 군으로 봉기가 확산되면서 의성의 만세운동은 계속하여 이어져나갔다.

의성 만세운동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은 3월 19일 도리원 시장에서 벌어졌다. 대사동교회 이양준 집사 등은 군중들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면서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일본 경찰이 시장을 폐쇄시키고 야만적인 탄압을 가하자 격분한 군중들은 일본 주재소로 몰려가서 항의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들이 30여 발의 총탄을 군중에 가격하여 권해운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주동자인 이양준 집사는 부상을 입은 채로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는 총상이 도져 복역 7개월 만에 가출옥하였으나 이듬해 3월 27일에 결국 순국하고 말았다. 지금도 당시의 길가에는 그를 기리는 순국기념비가 외로이 서 있는데, 비석에는 이러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예수교에 들어 집사가 되어 불의에 반항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을 받아 민족의 비운에 강개하여 민영환, 이준 제(諸)공을 흠모하더니 기미운동에 이르러 드디어 이같이 입절(立節)하였다.’

의성의 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사람은 그 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특히 기독교 지도자들의 숫자 만해도 30여 명에 가까운데 이들은 징역 4개월에서 2년형까지 언도받고 옥살이를 하였다.

영덕의 저돌적인 만세운동
영남에서 가장 과격하고 대중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바로 동해안의 영덕이다. 영덕은 조선말 대대적인 농민난이 일어났었고, 일제에 맞선 신돌석 장군의 항일의병정신이 유유히 흐르는 의기의 땅이다. 그런 강직함이 있었기에 지역교회들과 토착민들이 연합하여 가장 대중적인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영덕군 지품면 낙평동교회의 조사 김세영은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길을 가다가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다. 그는 친분이 있던 구세군 참위 권태원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구체적인 거사준비를 부탁하였다.

이에 권태원은 병곡면 송천동교회 조사 정규하를 찾아 동의를 얻고, 지역의 남세혁 남효직 권상호 등과 분담하여 영해면, 병곡면, 축산면, 창수면 내의 기독교인들과 농민들을 광범위하게 규합하여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 준비를 서둘렀다.

드디어 3월 18일 영해읍 시장의 장날이었다. 오후 1시경 정규하, 박의락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이에 약 3000여 명의 군중이 호응하였다. 정규하는 경찰서 앞 높은 단에 올라가 독립 연설을 하고 찬송가를 부른 후 군중과 더불어 경찰서로 몰려갔다.

지역의 경찰력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인근 포항과 멀리 대구의 헌병들까지 가세하여 군중들을 제압하던 중 실탄까지 발사하는 만행이 발생했다. 그 결과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16명이 부상을 입었다.

박창식 목사. 대구달서교회,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
박창식 목사. 대구달서교회, 총회역사위원회 위원장

이날 시위로 주동 인물 96명이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영덕면의 만세운동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전개됐다. 병곡면 병곡동, 창수면 창수동, 영덕읍, 지품면 원정동, 남정면 장사동 등에서 지역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산발적면서도 저돌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영남지방은 전통적으로 유교 강세 지역이었다. 그런데 복음이 유입된 후에 설립된 지역의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들이 리더십을 제공하고, 실질적인 통로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강력한 만세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영남지역에서는 천도교의 역할이 거의 없었고, 특히 경북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의 연합운동이 한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대신해서 기독교, 그 중에서도 장로교회가 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당시 영남지방이 미국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회의 선교구역이었으며 장로교회 숫자만 경북 295개소, 경남 235개소나 되었던 영향이 클 것이다.

주목해야 할 인물/ 대구 3·1운동의 정신적 지주 이만집

‘스스로 깨어있는’ 민족적 독립만세운동 주도

이만집(1875~1944)은 대구 3·1운동을 이끈 정신적인 지주이자, 해방 이전에 대구를 대표하던 기독교계 지도자였다. 그는 경상북도 월성군 강도면 호명리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는 중에 아담스(J. E. Adams·한국명 안의와) 선교사의 전도로 경주에서 입신하였다.

그의 사역은 계성학교 초창기 한문 교사로 시작되었다. 1917년 평양신학교를 제10회로 졸업하고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부해리 선교사와 함께 개척했던 남산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18년부터 대구제일교회에서 목회하는 중에 1919년 2월부터 대구 경북의 3·1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하였고, 특히 3월 8일 대구 큰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선도하였다. 이 일로 그는 대구지방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특이점은 1921년에 당시 선교사들이 주도하던 노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소위 ‘자치선언’을 한 것이다. “30성상에 비롯 각오하였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면 진리에 속하자. 교회는 신성한 것인데 불의의 구속을 어찌 당하리요. 금아(今我) 대구교회는 저 권리를 주장하는 선교사의 정신 지배를 받는 경북노회를 탈퇴하고 자치를 선언함.”

이 자치파동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1920년대 들어 한국인들의 의식이 깨어나며 선교사들과의 갈등이 일어날 수밖에 없던 상황에서 그것이 가장 먼저 드러난 것이 이만집의 자치선언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자치선언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면서 가지게 된 민족적이며 독립적인 신앙과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말년에 금강산 장안사 맞은편에 수양관을 건립하고 그곳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에는 신사참배의 강요를 피해 많은 사람들이 숨어들었고 이만집은 그들을 지도하였다. 그는 1944년 7월 1일 69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부는 1999년 8월 15일에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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