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 설교는 설교형식 아닌 설교철학 … 태양의 빛을 발하는 달처럼 성경 진리에 근거한 철저한 적용 선포해야

말씀의 권위 드러내고 청중의 거룩한 삶의 변화 도와라

대중매체의 중요성이 강조될수록 설교 전달에 대한 관심도 늘어갑니다. 최근 설교학은 한결같이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약화된 모습을 보이지만, 청중을 사로잡는 전달법에서는 강점을 보여줍니다. 이제부터 강해설교와 그 중심인물들을 소개합니다. 강해설교라는 이름은 성경적 설교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 전 총신대 교수

강해설교의 오해
강해설교란 한마디로 지금 예수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면 주어진 본문으로 선포할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자란 예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입니다. 본문 자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존 스토트나 해돈 로빈슨 같은 많은 설교자들이 “모든 진실한 설교는 강해설교여야 한다. 강해설교가 아닌 것은 설교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은 지나친 주장이 아닙니다.

강해설교를 둘러싼 몇 가지의 오해가 있습니다. 먼저 강해설교를 여러 설교형식 중의 하나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강해설교란 하나의 설교형식이 아니라 설교의 철학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여 청중에 맞게 전하면 어떤 설교형식이든 모두 강해설교가 될 수 있습니다.

강해설교에 대한 두 번째 오해는 한 책을 순서대로 하는 설교입니다. 대부분 강해설교를 한다고 말할 때 책을 차례대로 설교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창세기를 차례대로 설교한다면 이는 본문선택의 문제이지, 강해설교의 철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물론 한 책을 차례대로 선택해서 하는 연속강해설교는 가능합니다.

세 번째 오해는 주어진 본문을 한절씩 차례대로 주해하는 것을 강해설교라 생각하는 경우입니다. 본문 자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강해설교와 관련되지만, 차례대로 본문을 주해한다고 강해설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설교는 ‘절별설교(verse-by-verse preaching)’라고 불립니다. 요한 칼빈은 본문을 주석적으로 설교했기 때문에 본문을 잘 드러내지만 절별설교의 경향을 보입니다. 주석은 한 단어와 문장의 의미, 배경 연구를 통해 당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강해설교는 주어진 한 단락에서 이 모든 주석과정을 거친 후에 중심주제를 찾아내어 그 주제를 본문을 통해 전하는 설교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강해설교는 일정 길이의 성경구절을 택해야 가능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강해설교의 요체는 주어진 본문에 중심사상의 존재유무 문제입니다. 내러티브형식으로 된 본문은 시작과 전개와 결말이 들어있는 전체를 하나의 본문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잠언서에 나타난 다양한 내용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구절을 택해도 주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강해설교의 정의
강해설교란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에게 의도한 본문의 의미를 묵상과 주해를 통해 바르게 파악하여 먼저 성령께서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하게 하시고 청중의 삶 속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설교”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성경적인 강해설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첫째, 성경적 성경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절대진리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죽은 영혼을 살려내고 살아난 자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진리라는 것을 믿지 못하면서 성경적 설교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관이 무너지면 기독교 신앙은 무너지고 강단은 진리의 선포가 아니라 인간의 강연장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설교학은 심각한 오류를 담고 있습니다. 설교학이 전달의 영역을 중요하게 다루지만 성경 진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설교할 근본 이유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둘째, 해석학적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저자에게 의도한 본문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창세기에 나타난 아담의 타락을 두고 인본주의자들은 행복한 타락이라 부릅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온실 속에 자라나던 인간이 해방을 맞이했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주장이라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저자의 의도에 있습니다. 모세는 행복한 타락을 위해 창세기를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란 본문에서 설교자가 깨달은 것이나 사색한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을 전하는 위대한 사역입니다. 성경저자에게 의도한 본문의 의미라는 말은 해석학적으로 ‘저자중심의 해석’이라 불립니다. 저자가 없는 본문을 강조하는 신비평이나, 독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독자중심비평과 다릅니다. 저자가 의도한 말씀을 바르게 깨닫기 위해 성령의 조명을 기대하면서 묵상과 주해가 필요합니다.

셋째,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경해석은 물론 전달과정에도 영혼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설교에 앞서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설교자 자신이 먼저 말씀으로 거룩한 변화를 체험해야 합니다. ‘자신을 십자가 뒤에 숨겨주시고’라고 기도하지만, 오히려 부족한 자신을 십자가의 피로 새롭게 하시고 자신을 전인격적으로 사용하셔서 진리의 말씀을 힘 있게 선포할 수 있도록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설교자의 가슴에 먼저 생명의 말씀이 들려지고 그 충만한 은혜의 감격으로 강단에 설 때 청중을 변화시키는 진리가 쏟아져 나올 것입니다.

넷째, 설교의 목적입니다.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것이나 최선의 전달도 결국 설교를 듣는 영혼의 변화가 목적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는 구원의 복음으로, 이미 믿는 사람들은 거룩한 삶의 변화를 위한 복음으로 들려야 합니다. 제대로 된 설교란 예배당 문을 나서는 사람들의 가슴과 삶 속에 거룩한 변화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전달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도 중요합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전달방식과 헬라시대 바울의 전달방식은 매우 달랐습니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청중과 상황에 따라 가장 알맞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여섯째, 설교자의 자세입니다. 성경적 강해설교란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말씀 앞에 자신을 드리는 하나의 철학이라 했습니다. 아무런 자격도 없는 자가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거룩한 기쁨과 우리의 부족함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할 때 하나님은 친히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해박한 해석과 청중을 사로잡는 전달도 중요하지만 한 영혼을 향한 목자의 심정으로 강단에 설 때 하나님은 생명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마지막 설교인 것처럼 생명을 드려서 생명을 살려내는 설교자로 설 때 강단은 살아날 것이며, 한국교회는 거룩한 부흥의 불길로 타오르게 될 것입니다.

강해설교의 장점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강해설교란 몇 가지의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 강해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기에 말씀의 권위를 세워줍니다. 따라서 강해설교자가 지녀야 할 자세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설교자가 진정한 강해설교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설교자가 전하는 것이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설교자에게도 권위를 부여합니다. 설교자가 지니는 권위는 말씀의 수종자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권위에 반응하는 청중도 마찬가지입니다. 청중도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게 되고 반응하게 됩니다.

둘째, 강해설교는 성경의 본문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강해설교의 주제는 본문의 주제에 근거합니다. 강해설교란 주어진 본문 전체의 중심 주제를 찾아내어 그 주제를 본문을 통해 전하는 설교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를 만난 예수님을 전할 때는 핵심적으로 강조되는 ‘거듭남’에 관해 본문에 근거하여 설명해야 합니다. 본문을 직접 다루기 때문에 설교자는 본문에서 가장 강조되는 주제가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청중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알맞게 적용하지만 본문을 떠난 적용은 이미 성경적 설교의 권위를 상실한 설교입니다.

셋째, 강해설교는 진리에 근거한 철저한 적용이 가능합니다. 설교에서의 적용은 현대 설교학자들이 가장 거부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설교자는 본문을 풀어놓을 뿐 적용도 하지 말고 촉구도 하지 말 것을 강조합니다.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진리에 근거한 적용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설교란 말씀을 해석하고 전함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과 삶 속에 거룩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이 했던 “적용이 시작될 때 설교가 시작된다”는 말은 설교의 목적을 잘 대변합니다.

강해설교와 설교형식
강해설교는 하나의 설교형식이 아니라 설교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설교자는 자신의 생각으로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에 자신의 생각을 복종시켜야 합니다. 설교자는 태양이 아닙니다. 태양의 빛을 받아 빛을 발하는 달이어야 합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드러낼 수 있다면 설교형식은 어떤 것이라도 가능합니다. 어떻게 설교할지라도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드러내고 청중의 삶으로 적용할 때 강해설교의 근본 정의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설교형식은 본문이 지니는 고유한 형식을 존중할 수도 있고, 설교자 자신의 재능에 맞추어 설교하거나 청중의 삶에 가장 잘 인식되는 설교형식도 가능합니다.

설교란 하늘의 소리를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할 때마다 예수님이 회중 가운데 나의 설교를 듣고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말씀이야!”하고 주님이 고개를 끄덕이는 설교,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성경적인 강해설교입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