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저한 보수주의 신앙 전통, 호남 3·1운동에 결정적 영향

 

호남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세하여 3·1운동이 일어난 곳이 많다. 또 거의 모든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도적으로 3·1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선교지 분할 협정에 근거하여 호남지역은 1893년부터 미국 남장로교가 전주, 군산, 목포, 광주, 순천지역 등에서 의료선교 및 교육 선교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 남장로교의 신학과 신앙은 성경에 근거한 철두철미한 개혁주의 신학이었고 호남지역의 기독교는 이 신학과 신앙을 전수받은 보수주의 신학전통에 서 있었다.

박은식의 <독립운동 지혈사>를 보면 호남지역의 3·1운동 회집인수가 29만 4800명, 집회 222건으로 평안도 경기도 경상도에 이어 4번째로 높은 참여율을 보여주고 있다. 호남지역의 3·1운동은 여느 지역과 마찬가지로 선교사들이 주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가르친 성경에 입각한 철저한 보수주의 신학과 신앙은 호남지역 3·1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인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호남지역 3·1운동은 주로 미션 스테이션이 있었던 지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1. 전북지역의 3·1운동

군산지역

한강 이남의 최초의 3·1운동이며, 호남 최초의 3·1운동은 군산에서 일어났다. 3월 5일에 일어났기에 3·5만세운동이라 불린다. 이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계기를 살펴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세브란스병원 약제실에서 근무하던 이갑성은 군산 영명학교를 졸업학고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에 재학 중이었던 김병수 군산지방 연락책임자로 정했고, 김병수는 2월 28일 인쇄된 독립선언서 95장을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에게 극비리 전달하였다.

만세운동에 관한 연락을 받은 이두열 김수영 박연세 등의 영명학교 교사들, 그리고 예수병원 사무원 양기준 유한종 양성도(이들은 당시 구암교회 신자들이었음) 그리고 개복동교회 신자인 고석주 김성은 유희순 등과 의논하여 3월 6일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낌새를 눈치 챈 일본 경찰은 거사 전날인 3월 5일 박연세 이두열 등을 체포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영명학교 김윤실 선생은 긴급 학생회 임원회의를 소집하여 3월 5일 시위하기로 긴급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영명학교와 멜볼딘여학교 학생 100명과 교사 및 예수병원 직원 40명 등 140명이 운동장에 집결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교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모두 한 목소리로 만세를 외치며 대열을 이뤄 군산 시내로 움직였다.

이때 기독교 신도들과 부근 주민들이 함께 합세하여 500여 명의 군중들이 군산경찰서까지 진출하였다. 경찰은 재향군인과 이리(익산) 주재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군중을 해산시키고 주동 인물들을 강제로 검거했다. 박연세 이두영 등 교사 4명은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의 실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고, 양기철 등 학생 11명은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전주지역

전주지역의 3·1운동은 기독교학교와 교회를 중심으로 3월 13일에 일어난 ‘기독교인의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군산지역과 마찬가지로 전주에서도 미국남장로교가 세운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학생들(이 학생들은 전주 서문교회와 남문교회 신도였음)이 운동의 주축이 되었다.

기전여학교 출신의 임영신은 당시 충남 천안의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이었다. 기독교 단체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책임자였던 서울 남대문교회 함태영은 독립선언서 한 뭉치를 임영신에게 전달하면서, 전주지역의 시위운동에 사용하도록 종용하였다, 3월 1일 저녁 전주에 도착한 임영신은 서문밖교회(지금의 서문교회) 이돈수 장로의 집에 숙소를 정했고, 당시 서문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인전을 찾아가 상의하였다.

김인전 목사는 동생 김가전, 교회조사 이수현, 교회청년 김종곤 윤건중 최종삼 신일용등을 불러 만세운동을 계획했고 독립선언서 5000매와 태극기 다량을 제작하였다. 3월 3일 아침 독립선언서 한 장이 경찰에 발견되자 탐문과 감시가 강화되고,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봉쇄하기 위해 일시적 휴교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시위계획 주동자들의 설득으로 인해 학생들은 귀향하지 않았고 전주 장날이었던 3월 13일에 독립만세의 함성이 전주지역에서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전주지역 시위광경을 구체적으로 전달했던 <매일신보>의 기사들을 종합해 보면 3월 13일 정오경부터 심야에 이르기까지 총 4~5회에 걸쳐 시위가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총 44명(기전여학교 학생 13명 포함)이 검거되었다. 다음날인 3월 14일에 다시 시위가 일어났는데 오후 3시경에 완산교 부근에서 다수의 학생이 선두에 서고, 1000여 명의 군중이 태극기를 들었다. 이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본정 순사 파출소와 식산은행 앞까지 진출하였으며, 주모자 20여 명이 검거되었다.

일제의 재판기록에 의하면 전주지역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유죄판결을 받은 인물은 60명이었고, 그 중 기독교인은 21명이었다. 기전여학교 관련자 13명, 신흥학교 관련자 7명(교사 2명, 학생 5명), 서문교회 관련자 1명이다. 당시 신흥학교 학생이었던 김경신은 “독립운동은 종교단체에서 주동하였으니 기독교인들은 예배시간에 독립의 성취와 구금된 애국 동포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당시 서문밖교회 담임목사였던 김인전은 전주지역 3·1운동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비록 시위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기에 검거되지는 않았지만, 시위의 배후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일제의 표적이 되자 상해로 망명한다.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을 역임하였고, 나라사랑에 앞장 선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❶익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현장에서 숨진 문용기 열사의 혈의(독립기념관 소장). ❷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군산 영명학교의 옛 모습. 지난해 이 건물이 복원되어,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❸전주 신흥학교 교정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❹광주 수피아여고 교정에 건립된 3·1운동 기념탑. ❺목포 정명여고 교정에 건립된 독립기념비. ❻❼광주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오방 최흥종 목사와 전주 만세운동을 선도한 경재 김인전 목사. ❽광주만세운동 당시 수피아여고 학생이었던 윤형숙 열사의 팔을 일본 경찰이 자르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이 사건 이후 그녀의 이름은 윤혈녀로 불렸다.
❶익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현장에서 숨진 문용기 열사의 혈의(독립기념관 소장). ❷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군산 영명학교의 옛 모습. 지난해 이 건물이 복원되어, 군산3·1운동100주년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❸전주 신흥학교 교정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❹광주 수피아여고 교정에 건립된 3·1운동 기념탑. ❺목포 정명여고 교정에 건립된 독립기념비. ❻❼광주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오방 최흥종 목사와 전주 만세운동을 선도한 경재 김인전 목사. ❽광주만세운동 당시 수피아여고 학생이었던 윤형숙 열사의 팔을 일본 경찰이 자르는 광경을 묘사한 그림. 이 사건 이후 그녀의 이름은 윤혈녀로 불렸다.

익산 및 기타지역

익산지역의 3·1운동은 4월 4일 솜리장터에서 시작되었다. 익산 4·4만세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문용기이다. 문용기는 기독교신자로 당시 영명학교 교사였다. 그는 자신의 모 교회였던 남전교회 교인들과 함께 4·4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남전교회 집사였던 김치옥은 독립선언서를 현장에서 낭독하였고, 박성엽은 군산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왔고 문용기와 함께 연단에서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플래카드를 흔들며 만세를 주도하였다.

솜리시장 안의 사거리에 이르러 일본군의 총탄세례가 시작되자 시위군중이 동요하기 시작할 때 문용기는 더욱더 세차게 ‘독립만세’를 외쳤다. 화가 난 왜병은 태극기를 잡고 있던 문용기의 오른팔을 칼로 내리쳤다. 문용기는 쓰러지면서 ”나는 죽어 지하에서라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돕겠습니다”라고 외치며 숨을 거두었다.
익산 4·4만세운동으로 시위 군중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일본군에게 체포된 사람도 39명이나 되었다. 익산 4·4만세운동은 기독교인들이 독자적으로 나서서 만세운동을 시작한 것이었으며, 교회사적으로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실천운동으로 평가된다.

이밖에도 전북지역에서는 김제(3월 21일), 고창(3월 15일), 순창(3월 20일), 진안(3월 25일), 무주(4월 1일), 금산(3월 23일), 정읍(3월 21일), 장수(3월 26일), 임실(3월 10일), 부안(3월 26일), 남원(4월 3일) 등 각처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2. 전남지역의 3·1운동

목포지역

목포지역 3·1운동은 교회 지도자들과 청년들, 특히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교사 및 학생들에 의해 일어났다. 목포 최초의 만세 시위운동은 3월 20일에 일어났지만,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많은 군중이 참여한 만세운동은 4월 8일과 9일 양일간에 벌어졌다.

목포 양동교회 담임목사였던 이경필과 곽우영 장로 등이 주도하였는데, 정명여학교 교사로 봉직하던 곽우영은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제작하게 하고 만세운동을 열성적으로 이끌었다. 정명여학교는 4월 8일 교직원과 학생들이 항일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데 이어, 10월 4일 그리고 1921년 11월 14~16일의 만세 시위 역시 주도하였다.

여성의 사회참여가 쉽지 않았던 시대에, 여학생들이 3·1운동을 주도하고 검거 및 투옥되는 모습은 당시로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이때의 귀한 사료들이 현재 정명여학교 100주년기념관으로 사용되는 선교사 사택에서 발견되었다.

목포 3·1운동으로 검거된 이들 모두는 1년 이상 최고 3년형의 징역형을 받았다. 정명여학교의 박금엽은 당시 고등과 2년이었으나 만세운동으로 학교가 휴교되어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이경필 목사는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에 생활비로 엽전 8량(兩)을 받았는데 부인에게 엽전 4량은 자녀를 위해서 쓰고, 남은 4량은 서기현 장로와 서화일 집사에게 나누어서 도와주라고 하였다 전해진다.

광주지역

광주지역 만세운동은 3월 10일에 일어났기에 ‘3·10만세운동’이라 일컬어진다. 기미년 2월 말경 서울의 김필수 목사는 광주의 최흥종 김철에게 3월 1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알리고, 광주에서의 독립운동을 부탁했다.

3월 5일 밤 숭일학교 교사인 남궁혁 장로의 집에서 김철 김강 최병준 황상호 등 북문안교회 교인들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의 교사 및 학생들이 보여서 거사일을 3월 8일 광주 큰 장날로 정했다. 서정희가 일반시민을, 김강은 교인들을, 홍승애는 수피아여학교 학생을, 최병준은 숭일학교 학생을 동원하기로 했다. 최한영은 자신의 집에서 최정두 한길상과 협력하여 독립선언서, 태극기, 그리고 ‘서고아 2천만 동포’라는 격문 및 애국가, 독립운동가를 인쇄하였다. 송흥진과 손인식은 숭일학교 소유 등사판 2개를 가지고 와 인쇄에 쓰일 수 있도록 건넸다.

일본 재판부의 판결문에 의하면 당시 인쇄된 독립선언서는 무려 1500장에 이른다. 격문과 독립운동가도 200여 통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당초 거사일인 8일을 앞둔 시점에 인쇄 상황이 여의치 않아, 10일 오후 3시30분으로 날짜를 미뤘다. 9일 밤에야 인쇄된 독립선언서 등이 전달됐고, 최병준은 그 길로 숭일학교 학생들을 찾아가 “경성 기타 각지에서 이미 독립운동을 개시했는데, 유독 우리 광주에서 무시하면 다른 날 동지의 조소(嘲笑)를 어떻게 할 것인가. 부디 우리 지역에서도 똑같은 운동을 개시하자”고 권유했다.

이튿날인 3월 10일 오후 3시 무렵 광주 큰 장터인 광주교 인근 모래사장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시위 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의 개시를 선언했다. 양림리 방면에서는 숭일학교와 수피아학교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이튿날에도 오후 5시경에 숭일학교 학생들과 농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시위행진을 하였다. 당시 판결문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각 학교 학생들의 숫자가 숭일학교 100여 명, 수피아학교 20여 명 혹은 30명 등으로 기록됐다. 독립운동으로 재판을 받은 103명 중 10대와 20대는 89명으로 전체의 86.4%를 차지했다. 이중 숭일학교 학생이 24명으로 가장 많았고, 수피아학교 여학생이 20명 등이었다. 이들은 대체로 3년에서 6개월에 걸친 체형을 선고 받았다.

<조선독립 광주신문>을 발행한 일로 황상호는 3년, 홍덕주 장호조는 2년 반 형을 받았다. 숭일학교 출신자 중에서 사망자도 나왔다. 시위 도중 일본 경찰로부터 심한 타박상을 입은 송광춘이 복역 중 숨을 거뒀다. 주동자였던 최흥종 남궁혁 최병준 황상호 등은 후에 목사가 되어 호남선교에 크게 공헌하였다.

고흥 및 기타지역

고흥군의 3·1만세 운동은 고흥읍교회를 목양했던 목치숙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거의 대부분 40~50대였던 고흥읍교회 최초의 입교자들 중에 목치숙은 유일하게 20세의 젊은이였다. 1919년 3월 3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평양을 향해 길을 떠났던 목치숙은 서울에서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문제가 논의되고 있으니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이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학을 포기하고 독립선언문 1장을 구해 고흥으로 돌아왔다.

신종철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
신종철 박사(아세아연합신학대)

목치숙은 평양신학교에 재학하던 오석주와 협의하고, 이형숙의 자택에서 고흥지방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이때 뜻을 같이한 인사가 한익수 황보익 등이었다. 오석주는 독립선언서 100장을 준비했고, 목치숙은 태극기 80개를 제작했다.

거사일은 4월 14일로, 장소는 고흥장터로 정했다. 그러나 당일이 되자 새벽부터 비가 너무 많이 내려 시위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고흥군수, 순천법원 지청장과 순천 헌병분대 감독 보조원에게 익명으로 우송하였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기독교 중심의 3·1운동이 치밀하게 계획되었지만 우천으로 인해 아쉽게도 모의단계에서 그치고 만 것이었다.

이외에도 전남지역에서는 영광(3월 14일), 담양(3월 14일), 장흥(3월 15일), 순천(3월 16일), 장성, 화순, 강진, 완도, 제주(3월 21일) 등 각처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주목해야 할 인물] 호남지역 만세운동 기수 박연세 목사
식민통치에 굴하지 않고 신앙의 정조 지키다

박연세 목사
박연세 목사

박연세는 ‘민족구원에 앞장 선 목사’로 높이 평가되는 인물이다. 박 목사는 1883년 김제군 용지면 신사리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박자형은 군산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전킨(W. M. Junkin) 일행을 우연히 마을 앞길에서 만났고, 전킨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이후에 박연세는 아버지가 준 편지 한 장을 가지고 전킨 선교사가 살던 군산 구암(궁멀)으로 간다.

박연세는 전킨 선교사가 운영하던 영명학교에 입학했고, 전킨 선교사의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했다. 그의 교육에 대한 열의와 실력이 알려지자 모교인 영명학교에서 그를 교사로 초빙하였다. 이곳에서 한강 이남 최초의 3·1운동이었던 군산지역 만세운동을 구체적으로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주동자로 지목되어 체포당했다. 이후 그는 보안법등 위반혐의로 대구형무소에서 2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아야 했다.

형기를 마친 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된 박연세는 고현교회와 황등 동련교회에서 사역하다가, 1926년 9월 전남지역 최초의 교회인 목포에 있는 양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38년의 제30회 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이후 박연세 목사는 이것이 황민화정책이라는 것을 알고 분연히 도전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본기독교단이 발족하면서 목포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를 통폐합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박연세 목사는 연동교회 이남규 목사와 함께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고, 일제는 이를 계기로 두 목사를 비롯해 교회 관계자등 30여 명을 구속시키고 말았다. 불경죄와 보안법 위반 등 각종 죄목을 뒤집어 쓴 박연세 목사는 재판에 회부됐다. 근 1년 동안 미결수로 있었던 박연세 목사는 1943년 10월 목포지법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복심법원으로 넘겨졌다.

1944년 1월 대구법원에서 열린 재판정에서 “나는 육체적으로 천황을 존경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존경합니다. 언젠가는 천황도 예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그는 대구형무소 차디찬 감방에서 1944년 2월 15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박연세 목사는 일제강점기 총독부의 식민통치에 굴하지 않고, 복음과 민족주의 정신으로 신앙의 정조를 지켜낸 목회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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