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선한 목적으로 일할 때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 지혜를 주시고, 도울 자도 보내주시고,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여 주시는 것을 나는 자주 경험했다. 2001년 옥수중앙교회에 부임해서 10년이 지난 2011년 무렵부터 우리 교회의 장학·구제 사역이 처음으로 매스컴을 탔다. 10년 나눔의 영수증이었다. 교회 주변에 재개발이 한창이던 그해 9월 조선일보 기자가 첫 취재를 왔고, 그 후로부터 여기저기서 취재 요청을 해왔다.

당시 조선일보 이태훈 기자는 ‘산동네 한 집 두 집 비는데! 울보 목사님 교회는 비좁아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 교인들 사이에서나 통하던 내 별명 ‘울보 목사’는 그 덕분에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종교는 다르지만 요즘 베스트셀러 작가인 혜민 스님은 그 기사를 보고 “산동네에서 알게 모르게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시는 호용한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적지 않은 감동을 받는다”고 블로그에 글을 남겨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 나는 할 말이 별로 없을뿐더러 자랑할 것도 없다.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사람도 아니다. 우유배달을 비롯한 모든 장학·구제 사역은 내가 뛰어나거나 특별해서 감당한 것이 아니다. 단지 가난한 어르신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필요에 따라 있는 것들을 나누어 준 것 밖에는 없다.

한 장로님의 헌신으로 5년간 매주 토요일 짜장면 잔치를 열면서 엄마의 마음으로 섬기는 자세를 배웠다.
한 장로님의 헌신으로 5년간 매주 토요일 짜장면 잔치를 열면서 엄마의 마음으로 섬기는 자세를 배웠다.

5년간 토요일마다 자장면 잔치를 연 적이 있다. 압구정동에서 중국집을 하는 한 장로님이 내 친구 목사에게서 우리 교회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아, 매주 토요일 12시 자장면 100그릇씩을 준비해 오셨다. 장로님은 100그릇치 면을 삶아 아이스박스에 담아 오고 자장 소스도 따로 커다란 솥에 담아오는 등 여간 정성이 아니었다. 자장면만 내놓을 수 없어 우리 교회에서는 후식으로 과일이며 커피를 준비했다.

잔치가 시작되면 자원봉사자로 온 교인들이 어르신들을 안내해 의자에 앉게 하고, 자장면 한 그릇씩을 가져다 드렸다. 식탁 가운데 바나나며 귤이며 과일을 함께 놓아 드시게 했다. 어르신들이 맛있게 자장면을 드시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행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잔치를 몇 주일 하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의아심이 생겼다. 어찌된 일인지 어르신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과일을 드시지 않았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호주머니에 넣는 것이었다. “여기서 드시지 왜 싸가지고 가세요?” 한 할머니에게 넌지시 여쭈어 보았더니 할머니의 대답은 의외였다. “응! 집에 있는 영감 주려고…. 나는 맛있는 것 먹고 가는데 우리 영감 이거라도 갖다 줘야지!”

마음이 울컥했다. 거동 못하는 아내를 집에 두고 온 할아버지는 할머니 생각에 과일을 먹지 못했고, 어린 손자를 키우고 있는 할머니는 자신보다 손자 입이 먼저였다.

생각해 보니 내가 어렸을 적 우리 엄마도 그랬다. 잔칫집에 다녀오시는 길이면 엄마는 늘 떡이며 전이며 돼지고기를 신문지에 둘둘 말아 품에 안고 오셨다. 그러고는 잔치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자식들 옆에서 식은 밥에 물 말아 드시곤 했다. “나는 많이 먹고 왔으니 어서들 먹어!” 엄마의 그 음성이 지금 새삼 그립다.

나는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졌다지만 가족의 사랑만큼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옥수동에서 목사로 살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엄마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품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성경은 가난하고 병들고 힘없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지 아니하는 자를 엄히 책망하고 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지 아니한” 것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은 영벌에 들어가리라”고 하셨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복음 전도에 열정을 쏟는 만큼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마음과 눈과 손을 가지고 구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이웃을 구제하고 봉사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테레사 수녀는 말했다. “내가 가장 먼저 보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 속에서 고통 받고 계시는 예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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