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내 장터에서 철원·양양까지 뜨거운 독립만세 함성

이영식 박사(총신대 역사신학)
이영식 박사(총신대 역사신학)

서울에서 민족대표 33인 혹은 48인이 선언한 조국독립의 꿈과 파고다공원에서의 외침은 한민족의 염원이었고, 민족자존의 선언이었으며, 마치 독립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듯 겨레의 간절한 절규이기도 했다. 그 꿈과 함성은 전국 주요 도시와 인근 경기도, 충청도와 강원도 그리고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기독교 측과 천도교 측이 각각 담당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했고, 고종황제 인산일에 참여하러 왔던 지방 사람들이 독립선언서를 받아 감추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 충남지역: ‘횃불독립운동’ 그리고 병천(아우내)

횃불, 전도부인, 공주 영명학교
충청남도 독립만세운동은 3월 3일 예산과 대전 인동시장에서부터 시작하여 4월 12일까지 약 40일간 계속되었다. <충남을 빛낸 독립운동가>에 의하면, 충남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은 195개면 256개리의 327개소에서 339회에 걸쳐 전개됐다.

3월 3일에 예산읍 예산리에 사는 윤칠영 등 5명이 밤에 산 위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같은 날 대전의 인동시장 나무장터에서 나무꾼들이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이 지역 만세운동의 두드러진 특징은 장항, 홍성, 예산, 서산, 당진, 대전 가수원, 천안 병천 등 여러 곳에서 산 위에 횃불 혹은 봉화를 밝히고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독립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다른 마을에도 전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도 기독교가 앞장서서 독립운동을 진행했던 사례가 많다. 특히 전도부인들이 큰 역할을 했다. 3월 18일 오후 홍성에서 기독교 전도부인이 각 동리로 다니면서 독립만세를 부르자는 약속을 받았고, 9시경에 수많은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해산하였다. 또한 3월 30일에 예산 장날을 이용하여 기독교 예배당에서 전도부인들이 독립만세를 외치자, 시장에 모여든 4000여 명의 군중들이 호응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시위행진을 벌였다.

그리고 4월 2~3일 양일에 아산 구읍에서는 밤 8시를 기하여 영인산에 봉화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기독교인들이 앞장서고 뒤에 수많은 군중이 따르면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하였다. 이때 둔포, 백석포, 공세리 등의 각 해안지대에서는 일제히 불을 놓고 조국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공주에서의 독립운동은 기독교 인재를 배출했던 영명학교에서 시작되었고, 영명학교는 계속해서 이 지역 항일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영명학교 교사 김관회, 이규상, 현언동과 목사 현석칠 등이 3월 24일에 모여, 공주읍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학생 유우석(관옥), 양재순, 노명우 등이 이 계획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기숙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대형 태극기 4개를 만들었다.

4월 1일 오후 2시에 교사들과 학생대표들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삼엄하게 경계를 하고 있던 헌병 경찰에 의해 모두 체포되었다. 또한 아산, 서산, 유성시장 등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합동하여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사례들을 확인할 수 있다.

아우내장터의 함성
충남의 독립만세운동은 천안 병천(아우내)장터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천안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14일 목천면, 20일 입장면, 29일 천안면, 30일 풍세면 등으로 이어졌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유관순이 학교 휴교령으로 인해 3월 13일에 귀향하머, 병천만세운동은 불처럼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했던 독립만세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또한 지령리교회(매봉교회) 성도들이 이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유관순이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서울에서의 3·1독립만세 상황을 전하면서 고향 어른인 조인원(조병옥의 부친)과 자신의 아버지 유중권과 숙부인 유중무에게 독립운동을 촉구했다는 주장과, 어른들이 병천시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손수 제안했다는 견해로 갈린다. 아무튼 병천 장날 거사는 결의되었다.

유관순은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수많은 태극기를 만들었고, 주변지역을 왕복하면서 만세운동을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거사를 하루 앞둔 날 밤, 유관순은 동생 관복과 친척 유제한과 매봉 꼭대기에 올라가서 봉화를 올렸다. 매봉의 봉화는 각 마을의 독립만세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봉우리마다 독립을 염원하는 불길이 타올랐다.

4월 1일 거사의 날이 밝아오고 병천 장터에서 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수신면·성남면 계통은 홍일선 김교선 등 20대 청년들이 뜻을 같이하여 운동을 펼치게 되었고, 동면은 매봉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인원 유관순 유중권 김구웅 등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병천 장터로 진입하였다. 이소제 부덕 유예도 등은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조인원 유중권 유관순 유중무 김구웅 김상헌 김교선 조인원 아들 조병호 등이 대오를 이루고 나아갔다. 3000여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를 소리쳐 외치며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일제 군경은 잔인무도하게 총검을 휘둘러 살상을 감행했다. 이때 조인원은 총에 맞아 중상을 입었고, 유중권은 총에 맞아 순국했다. 이에 부인 이소제는 악에 받쳐 달려들었으나 헌병대장의 총에 쓰러졌다. 유관순의 눈앞에서 양친 부모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김구웅이 또한 총에 맞았고, 이를 지켜보던 김구웅의 노모가 달려오자 헌병은 잔인하게 칼로 베어버렸다. 이렇게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되었다.

이에 오후 4시경 격분한 군중들이 순국한 사람들의 시신을 헌병주재소로 옮겨놓고 습격하여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날 모두 19명이 순국했고,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체포된 조인원 유관순 유중무는 징역 3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천안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기백이 살아있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공주지역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영명학교 학생들의 정신을 기리는 항일운동기념비. 양양지역 만세운동을 선도한 조화벽.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였다. 충북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기념하며 조성된 청주의 3·1공원. 철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묘사한 서울 탑골공원의 부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천안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기백이 살아있는 아우내독립만세운동기념공원. 공주지역 독립만세운동에 앞장선 영명학교 학생들의 정신을 기리는 항일운동기념비. 양양지역 만세운동을 선도한 조화벽.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과 결혼하였다. 충북 일대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기념하며 조성된 청주의 3·1공원. 철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묘사한 서울 탑골공원의 부조.(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2. 충북지역:피로 그린 태극기

충청북도 출신 3·1독립운동가로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손병희 권병덕 신석구 신홍식 권동진 등을 비롯하여 142명이 있다. 개성지역 3·1운동을 주도한 어윤희도 충주 출신이다. 충북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일 혹은 3월 7일에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3월 9일 청주농업학교에서 시초가 이루어지고 본격적으로는 3월 19일 괴산읍장터에서 펼쳐졌다고 보고 있다. 충남처럼 이 지역도 횃불 혹은 봉화로 독립만세운동을 진행해 나갔다는 것이 특징이다.

충북지역 독립만세운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3월 9일 청주공립농림학교에서는 학생 70여 명이 청남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이를 알아챈 일경의 단속으로 인해 전개되지 못했다.

청남학교는 1904년 김태희 방흥근 김원배 등 대한예수교장로회 청주읍교회의 구국이념을 가진 청년들에 의해 시작된 충북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이다. 김태희 김종원 이호재 방흥근 이창재 등의 교사들이 장로로서 교회를 섬기기도 했다. 김태희는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교회 청년들을 규합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3·1독립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상해 임시정부 연통제의 충북참사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충북 기독교인들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기독교 신학생 장양헌은 3월 초 서울에서 경고문을 가져와 유석보와 함께 교회에서 수백 매를 인쇄하였고, ‘최 집사’는 이를 여러 곳에 배포하였다. 이들은 장소를 탄금대로 옮겨 태극기와 경고문을 만들었다.

3월 15일 진천 각 면에서는 산에 불을 피우고 기독교 전도부인은 각처로 순회하면서 만세를 부르며 격려했다. 또한 3월 24일 음성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어서 3월 말경에 김종부 장양헌 최명희 최봉기 권태은 박찬병 김종태 등 주로 기독교인들이 결의하여 여러 집에서 모임을 갖고 권유하면서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김종부는 창칼로 왼팔을 찔러 피로 태극기를 그리고, 독립을 고취하는 장양헌의 말을 태극기에 적었다. 그리고 경고문과 독립가 각각 1통씩을 별도로 작성하고 태극기 수십 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발각되어 김종부 장양헌 최명희 오언영 등이 체포되며 시위가 거행되지는 못했다.

4월 1일 영동 황간에서는 정거장 앞산에 불을 피우고 수백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기독교 예배당에서는 종을 쳐서 교인들을 모아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

4월 1일에 충주 사람이자 기독교인 이희갑을 비롯해 한태억 이강렴 손승억 윤무영 윤복영 이강호 김은배 등 주로 20대 청년들이 신니면 용원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결행했다. 이때 이희갑은 장터에 모인 500여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다수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시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3. 강원도:철원에서 시작, 치열했던 양양

강원도 독립만세운동에도 역시 기독교의 중심적 활약이 있었다. 3월 10일 철원에서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고, 5월 9일 치열했던 양양 만세시위로 그 절정에 이르렀다. 산간벽지의 사람들이 새벽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50~60리의 길을 걸어와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기록에 의하면 강원도는 총 57회 시위, 9만 9510명 참가, 사망 144명, 부상 645명, 투옥자 1250여 명에 달한다.

철원에서 가장 일찍 3월 10일부터 본격적인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때 기독교인들, 천도교인들, 학생·청년 등이 힘을 합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동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철원읍교회 박연서 목사는 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시작해, 전 군민이 참여하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교인들과 철원농업학교 및 철원보통학교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미리 준비하여, 10일 오후 3시에 집결하여 군중과 함께 서문거리로 진출하며 만세를 불렀다. 또한 철원읍교회 전도사(전도부인) 곽진근, 미션스쿨 정의학교 교사였던 김경순, 호수돈여학교 출신 이각경 등이 앞장서 군중들을 이끌었다. 시위대는 군청에서 합류하여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1일에는 아침부터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서문거리에 군중이 모였다. 일제는 기마헌병을 앞세워 군중들에게 발포하며 만세시위를 해산시켰고, 그 과정에서 71명이 피검되었다. 곽진근 등 6명의 애국여성들은 징역 3개월부터 6개월까지의 형량을 언도받았다. 김화 출신 김재근(김상덕)은 연희전문학교 재학생으로서 서울에서 학생 3·1운동을 전개하다가 귀향하여 8월 11일 박연서 목사 그리고 강대려 김완호 이용우 등과 함께 ‘대한독립애국단’의 지단으로 ‘철원애국단’을 조직하고 임시정부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강릉에서는 4월 2일 장날 감리교 안경록 목사를 선두로 태극기를 뿌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횡성에서는 3월 27일에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300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였고, 다음 장날인 4월 1일에는 기독교인 정해경이 가담하여 활약하며 1300여  명의 군중이 시위를 벌였다.

통천에서는 장전리 유시국 목사와 최상린 등 기독교인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4월 2일 교인들을 모아 시위를 전개했으며, 3일에는 최상린 김두만 안흥식 우낙영 등에 100명이 넘는 군중들이 호응하여 경찰 주재소까지 몰려가 독립만세를 외쳤다. 홍천군 홍천읍에서는 기독교와 천도교가 연합하여 만세운동을 추진했으며, 기독교인 김기현은 김수완 등 5인과 태극기를 만들고, 차봉철 서상우 등과 함께 4월 1일 장날을 기해서 밤늦도록 시위를 전개했다.

만세시위는 양양지역에서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 지역은 기독교계와 유교계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3월 말에 봉기가 일어났다. 특히 조화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화벽은 감리교회 조순영 전도사의 딸로서, 개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기독교 호수돈여학교 고등과 졸업반이었다. 당시 어윤희 전도사와 연계하여 만세운동에 앞장서다가 학교가 휴교하자 고향 양양으로 돌아갔고, 도착하자 일경에게 소지물을 압수당했다. 그러나 버선 속에 숨겨둔 독립선언서는 발각되지 않았다.

조화벽은 교회 청년 김필선에게 선언서를 전달하여, 김재구 김길용 등과 함께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었다. 이들은 4월 4일 양양 장날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군중은 계속 늘어났고 거리마다 태극기와 만세소리로 가득했다. 경찰이 군중에게 발포하여, 8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조화벽은 유관순의 오빠이자 공주 영명학교 독립만세에 앞장섰던 인물인 유우석(유관옥)과 결혼하였다.

신앙이 토대가 된 나라사랑, 영원한 빛이 되다

주목해야 할 인물/ 조국을 품은 신앙인 유관순 열사

18세 나이로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옥중 순국한 유관순.
18세 나이로 만세운동에 앞장서다 옥중 순국한 유관순.

유관순은 천안군 동면 용두리(지령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관심이 있었고, 그의 친척 유빈기의 전도를 통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유중권은 입교하여 조병옥의 부친 조인원과 함께 지령리교회(매봉교회) 발전에 큰 역할을 했으며, 유관순은 자연스럽게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공주에서 사역하던 샤프(Alice J. Ham-mond Sharp) 선교사는 지령리교회에 순회전도차 들르곤 했는데, 그녀의 도움으로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를 거쳐 교비유학생으로 1916년 4월 1일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였다.

유관순은 박인덕 선생으로부터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나라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밤중이나 새벽에 텅 빈 예배실에 혼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조국광복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다고 한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면서 유관순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 뒷담을 넘어가서 독립만세 대열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학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유관순은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귀향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다니면서 만세운동을 촉구하고 협의하였다. 또한 조인원 유중권 유중무 김구응 등과 아우내 장날을 이용한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토록 치열한 천안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독립만세를 고창했던 군중들을 경찰과 헌병대원들은 총검으로 무자비하게 진압하였다. 유관순은 눈앞에서 부모가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조국 독립을 위한 숭고한 죽음이었다. 유관순은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공주 영명학교에서 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된 오빠 유우석을 거기서 잠시 만날 수 있었다.

유관순은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감금되었고, 어윤희 박인덕과 함께 옥중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옥중의 만세운동에는 절도자 강도 사기범들까지 가세했고, 그 함성은 외부로 번져갔다. 소녀 유관순은 계속되는 투쟁과 고문으로 1920년 10월 21일 그녀의 부모를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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