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선언서 서명한 16인 지대한 영향 그려

확고한 신앙관 가진 기독교 대표
거족적 민족독립운동 주도하다

이 책의 제목은 <3·1운동과 기독교 민족대표 16인>(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엮음)이다. 기독교인이라면 3·1운동은 기독교가 주도한 운동이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절반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16인의 기독교민족대표가 누구였는지를 공부한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자긍심을 높이는 일일 뿐만 아니라 민족대표가 살았던 당시의 기독교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배울 수 있겠다.

16인을 포함한 33인은 3월 1일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한 뒤 헌병대에 전화를 걸어서 자수했다. 그리고 곧 도착한 헌병들에게 끌려가서 옥고를 치렀다. 그들은 탑골공원에 나가지 않았고 일제의 총칼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만세를 목청껏 외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3·1운동은 단기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민족대표로 선언한 것 자체가 스스로 목숨을 내놓는 결단이었다.

기독교인 민족대표들은 어느날 갑자기 서명자가 되지 않았다. 확고한 신앙관을 가지고 빼앗긴 주권을 찾기 위해 독립운동, 교육운동, 사업 등으로 헌신했던 전력들이 있었다. 독립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확신하며 대의명분을 위해서 생각이 다른 이들과 손을 잡을 줄도 알았다. 서대문형무소 등에서 고문을 당하고 옥고를 치렀지만 독립운동을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함께 수감 중인 조선인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대안을 내놓았다. 출옥 이후 다시 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재수감되어 고초를 당한 이들도 있었다. 해방이 되어서도 민족구원의 열망을 가지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완전한 독립을 주장했다. 물론 수형생활을 마치고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해서 손가락질 받은 지도자도 있었다.

1919년 민족대표들이 서명하고 태화관에 둘러앉아 읽었다는 독립선언서가 대단한 무게로 느껴진다.

한편 3·1운동은 대부분의 지역에서 기독교에 의해 주도되었다. 걸출한 인물들이 곳곳에서 나서 3·1운동의 진행과정을 도왔다. 기독교계가 이처럼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교단의 조직화와 무관하지 않다. 장로회만 해도 1907년 독노회를 조직했고 1912년 총회를 구성했다. 미감리회는 1908년, 남감리회는 1918년 각각 연회를 조직한 후 산하에 지방회를 구축했다. 전국적인 연락망이 있었기에 기독교회가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했다.

수없이 듣고 있는 이야기겠지만 3·1운동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의 1.5%였으나 3·1운동에 앞장서다가 체포·수감된 기독교인의 수는 전체 수감자 20% 내외를 차지했다. 흥미롭게도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교세는 20% 가량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의 간행사를 쓴 이만열 교수는 “3·1운동은 한국사에서 최초로 자주 민주 평화 일치의 통합적 정신을 보여준 중대 사건으로 한국의 민주공화정 수립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고 평가했다. 또 이 교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관련, 3·1운동이 끼친 영향은 지대한데, 이는 ‘동학농민혁명’과 ‘독립협회운동’이 3·1운동을 거쳐 해방 후 ‘4·19 혁명’과 최근 ‘촛불혁명’에 이르는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3·1운동은 누가 뭐래도 “일제 강점하에서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분출시킨 거국적인 민족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에 기독교계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20세기 초 격동의 세월을 살아냈던 기독교 민족대표 16인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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