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용한 목사의 옥수동 소나타]

2003년 봄이었다. 나는 교회 근처에 살고 있는 가난한 노인들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지금에야 달동네라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아파트촌으로 바뀌었지만 그 때만 해도 옥수동과 금호동은 다닥다닥 붙은 다세대 주택이나 옥탑방, 그리고 낡은 슬레이트 지붕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등이 굽고 초라한 옷차림으로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어르신을 볼 때면 끼니나 제대로 챙겨 드시는지 늘 염려되었다.

무엇보다 혼자 사는 어르신이 집에서 혼자 돌아가셨을 때 그것을 알아줄 사람조차 없으면 어쩌나 걱정되었다. 신문이나 TV에서 간간히 보았던 돌아가신 지 몇 달 만에 앙상한 뼈만 남긴 채 발견되었다는 ‘고독사 이야기’가 우리 동네 이야기일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서늘해졌다. ‘이들을 위해 할 일이 없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며 기도하는 중에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길이 열렸다.

옥수동의 풍경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계명은 이곳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옥수동의 풍경은 우리 사회의 양극화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계명은 이곳에서 더욱 무겁게 다가온다.

바로 처남의 헌신이었다. 그는 3년간 매월 200만원씩을 보내 주기로 하고, 그 약속을 지킨 것이 바로 100가구의 독거노인들에게 배달하는 우유배달의 첫 시작이 되었다. 처남이 첫 단추를 잘 꿰어준 덕분으로 우유배달은 3년을 훌쩍 지나 오늘까지 1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다른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계속되고 있다. 그 뿐 아니라 지금은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16배나 많은 1600여 독거노인들에게 매일 아침 우유로 안부를 묻고 있다.

금호동 작은 임대 아파트에 사는 한 할머니는 만날 때마다 내 손을 꼭 잡고 감사 인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할머니는 다리가 불편해 걷지도 못하고 배로 기어 다니시는데, 방에서 현관까지 배달된 우유를 가져가는 데만 5분이 걸린다. 우유를 배달한답시고 괜히 고생을 시켜드리는 게 아닌가 하여 “죄송해요. 할머니! 힘드신데!”하고 내가 손을 잡고 인사를 하면 할머니는 손을 내어저었다.

“그런 소리 말어! 자식들도 못하는 일을 교회가 하는데, 아침 문안 인사를 받는 것 같아 얼마나 행복한데?” 하시며 몇 안 남은 이를 내보이며 웃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180mg짜리 작은 우유에 불과하지만 의지할 데 없는 쓸쓸한 어르신들에게는 이 우유배달이 문안 인사처럼 반가웠던 것이다.

어르신들을 만나 이런 저런 말을 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구제를 올바로 했나 돌아보게 됐다. 구제가 전도와 연결되어서 나쁠 것은 없다. 육의 양식보다 영의 양식을 더 주고 싶은 마음도 맞다. 그러나 구제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사랑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주님의 지상 위임 명령에만 초점을 맞추어 “가서 제자를 삼고 가르치고 세례를 주는 일”들을 열심히 해 왔다. 교회는 성장했고, 곳곳마다 교회당이 우뚝 섰다. 실력 있는 목회자들도 많이 배출되었고 성경공부와 제자훈련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상명령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대계명이 있다. 이웃의 가난과 고독, 고통과 아픔에 구체적인 사랑을 가지고 동참하라는 명령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는 첫 번째 명령에 열심 내는 만큼 두 번째 명령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억압당하고 억울한 형제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외면한 채 하나님을 섬겨왔다. 그 결과 교회는 놀랍게 부흥했지만 세상은 무섭게 타락해 버렸고, 결국 교회를 외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갈등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을 동시에 듣게 된다. 제자를 삼는 지상 위임명령과 이웃을 사랑하는 대계명 중 어느 한 쪽에도 소홀할 수 없다. 두 사역은 동시에 일어나야 한다.

호용한 목사는 옥수중앙교회 담임목사이자 사단법인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배달> 이사장으로서, 17년째 옥수동 일대 독거노인들을 위한 우유배달 사역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 스토리를 담은 책 <달동네 울보목사>(넥서스 크로스)를 2016년 출간했습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