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시대, 소망의 횃불 들고 민족의 앞길 밝히다

1. 3·1독립운동 준비:조국 독립에 목숨을 걸다

절망의 시대, 소망의 횃불을

이영식 박사(총신대 역사신학)
이영식 박사(총신대 역사신학)

100년 전 그토록 조국독립을 열망했던 우리 선진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자유를 외쳤던 그 함성이 오늘도 들리는 듯하다. 절망의 시대, 한국기독교는 두려움과 서러움에 떨고 있던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소망을 제시했고, 눈물바람으로 살아가야 했던 겨레를 가슴에 품고, 고난의 언덕을 함께 넘어갔다.

말씀에 생명을 걸었고 복음의 열정을 실천하면서, 구국기도회를 하고, 교회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만들어 불렀으며, 교회 안에 갇혀서 비인도적 폭압에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문을 열고 달려 나가 조국의 역사적 대열에 앞장서서 소리높여 외쳤다. 팔이 잘리기도 하고, 총칼에 맞아 쓰러지고, 치욕스런 고문을 당하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나아갔던 것은 기독교인으로서 시대적이고 민족적인 사명감과 백성으로서의 조국독립에의 강렬한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청년들, 젊은 남녀학생들, 상인들, 소학교 학생들 그리고 기생들과 거지들까지 그 민족자존의 대열에서 태극기를 높이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소리쳐 외쳤다. 한민족은 1910년 8월 29일 선언된 ‘경술국치’를 당하여 주권을 빼앗기고, 국토의 40%를 강탈당하고, 조국의 산야와 해안에서 산출되는 산물들과 노동력까지도 수탈당했다. 이러한 절망의 상황들이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크게 했다. 김양선 목사의 말대로 “한국 인민에게는 절망 이외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 절망 속에서, 기독교도들은 감연히 일어나서 희망의 횃불을 들어 민족의 앞길을 밝혀주었다.”

준비:조국독립에 목숨을 걸다

1919년 3월 1일의 거국적 독립운동은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있어서 가능했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준비하였고, 노령 만주지역에서는 김약연 장로와 용정교회 등이, 미주지역에서는 대한인국민회의 안창호, 이승만 등이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활동이 일본 한인유학생들에게 전해져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이뤄졌다.

한편 국내 기독교는 서북지역과 서울지역에서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1918년 제7회 장로교총회에 여운형과 이승훈의 국내 궐기에 대한 의견교환이 있었고, 1919년 2월 6일경 상해에서 선우혁 집사가 서북지역으로 와서 양전백 목사와 이승훈 장로를 만나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이후 길선주 목사와 서북지역 교역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독립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한편 서울지역 기독교 측은 박희도와 김원벽 등 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종로 YMCA와 남대문 이갑성 등을 중심으로 세브란스병원에서 계획을 하고 있었다. 이처럼 기독교가 자체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도교와 합동을 한 것이다.

남강 이승훈 장로는 2월 10일에 상경하여 송진우를 만나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이승훈은 일단 기독교계를 결집하면서도, 천도교 측과의 합동을 추진해 나갔다. 기독교계는 몇 차례 회합을 가지면서, 지방순회위원을 세워 전국 주요 도시에 거사의 의의를 전하고 협력자를 세우고 청원서에 날인할 사람들을 접촉했다. 2월에 기독교 자체에서 3번의 공식적인 회합이 있었고, 천도교와도 세 번의 회의를 통해서 준비를 했다.

무엇보다 민족대표자들은 죽음을 각오했다. 법률가였던 함태영 목사는 민족대표자는 내란죄를 뒤집어 씌워 사형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필요한 공동경비 목록에는 민족대표자가 사형을 당할 경우, 그들 가족의 생계비가 들어있었다.

서울과 수도권 만세운동의 핵심 역할을 한 기독교인들, 이승훈 김원벽 어윤희. 기독인들이 중심이 된 강화의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서양 선교사로 3·1운동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전해 34번째 민족대표로까지 불린 스코필드. 3ㆍ1운동이 벌어진 당시 승동교회 차상영 목사 등이 작성해 조선총독부에 전달한 ‘12인 등의 장서’ 전문.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제암리교회와 마을의 모습.(왼쪽부터 시계방향)
서울과 수도권 만세운동의 핵심 역할을 한 기독교인들, 이승훈 김원벽 어윤희. 기독인들이 중심이 된 강화의 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서양 선교사로 3·1운동의 실상을 세계에 널리 전해 34번째 민족대표로까지 불린 스코필드. 3ㆍ1운동이 벌어진 당시 승동교회 차상영 목사 등이 작성해 조선총독부에 전달한 ‘12인 등의 장서’ 전문. 일본군에 의해 파괴된 제암리교회와 마을의 모습.(왼쪽부터 시계방향)

2. 3·1독립선언과 서울에서의 전개

독립선언서는 2월 27일 밤 2만1000매를 인쇄 완료하여 28일에는 주요 도시에 대부분 배포되었다. 3월 1일 2시에 탑골공원에서 개최하기로 했던 독립선언은 폭력의 우려가 있다는 박희도의 제안에 의해서 태화관에서 하기로 했고, 비무장 평화적인 독립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약속된 시간에 민족대표 33인 중에 사경회 등의 이유로 29인의 대표가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불렀다.

그러나 탑골공원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독립선언을 기다리며 모여 있었다. 이때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가서 독립선언서를 “크고 명랑하게 읽어 내려갈 때, 군중은 숨을 죽이고 듣다가 민족대표 33인 이름의 호명이 끝나자마자 만세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민족의 가슴에 응결된 울분의 폭발이었고, 독립을 염원하는 외침은 천지를 진동시켰다. 이어서 학생들과 시민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행진했다. 지나가는 행인도, 상인들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3월 1일 당일 시위는 서울, 평양, 선천 등 12곳에서 일어났고,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은 지대했다. 민족대표 33인 중에는 길선주, 이승훈, 양전백, 김병조, 유여대, 이갑성, 이명룡 등 기독교인 16명, 천도교인 15명, 그리고 불교인 2명이 있다. 장로교 스코필드(F. W. Schofield) 선교사를 ‘민족대표 34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서울 탑골공원의 시위는 시민들이 합세하여 기세는 더욱 높아져 갔다. 이날 오후 8시에 마포 전차종점 앞에서 수천 명이 만세를 부르고, 11시경에는 기독교부속 소학교 학생 100여 명이 모여 서강·동막에서 수천 명 군중과 같이 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었으며, 또한 밤 11시 경에 세브란스의전의 교정에서도 약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고, 밤이 새도록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다음날과 또 그 다음날에도 계속 이어졌다. 전문학교 및 중학교 학생들은 보성전문 강기덕과 연희전문 승동교회 김원벽을 대표로 하여 3월 5일 9시경 남대문역 앞에 수천 명이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진행했다. 인력거 위에서 시가행진을 지휘하던 김원벽과 강기덕은 일경에 의해서 체포 구속되었다.

또한 민족대표자들이 계획한 제2진의 독립운동이 함태영의 수감으로 인해 사실상 그 열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을 때 서울 안동교회 김백원 목사, 승동교회 차상진 목사, 의주교회 양실학교 교사 문일평 집사, 정주 덕달교회 조형균 장로, 양평교회 광탄학교 교사 김극선 등 12인이 3월 12일 서울 서린동에 모여 13도 대표의 이름으로 “조선독립은 2000만 동포의 요구이다. 오등은 33인 민족대표자의 후계자로서 조선독립을 요구한다”라는 내용의 <12인 등의 장서(長書)>를 작성하고 차상진 목사와 문성호가 조선총독부에 전달하였다. 두 사람은 즉시 체포되었고, 문일평 조형균 김백원 등은 종로 보신각 앞에 시민들을 모아놓고 장서를 낭독한 후에 만세시위를 벌였다.

3. 경기지역

개성 호수돈여학교

3·1독립운동의 불길은 인근 경기지역으로 번져갔다. 3월 1일 수원과 3월 3일 개성지역을 시작으로 경기도 전역에서 독립만세는 고창되었으며, 18일 강화도에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개성의 만세운동은 1899년 남감리교 선교부에서 세운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호수돈여학교 졸업생이자 교회 유치원 교사였던 권애라가 정춘수 목사가 전했던 독립선언서를 받아, 이 학교 출신인 어윤희 전도사에게 전달했다. 어윤희는 신관빈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3월 3일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이 시가지로 몰려나오며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어윤희는 선언서를 소지하고 연설을 하면서 나아갔고, 여성교인들과 청년들이 뒤를 따르며 전단지를 뿌리면서 만세를 불렀다. 이때 일반군중들도 가담하여 전체 규모가 1000여 명에 달했고 시위는 계속되었다. 어윤희는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모진 고초를 겪었다. 서대문형무소 ‘여자감방 8호실’에는 어윤희, 유관순, 이애주 등이 수감되어 있었다.

대규모 만세시위: 강화도

경기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만세운동은 3월 18일 강화 장날 만세시위였다. 당시 2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고 한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세운 연희전문학교 2학년 학생이던 황도문은 3·1독립운동으로 인해서 휴교조치가 내려지자, 3월 6일 <독립선언서> <국민회보> <독립신문> 등의 인쇄물을 가지고 고향 길상면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감리교 선두리교회 창설자인 황유부와 염성오 권사, 유봉진 권사에게 서울의 독립운동 상황을 전해주었고 함께 독립운동을 논의했다. 거사일은 18일로 정했고, 길상면이 아닌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강화읍 장날을 택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 수백 장과 유인물을 인쇄하였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시위대장 유봉진(34세)을 비롯한 유희철(27세) 황일남(23세) 조상문(21세) 장동원·장명순(20세) 황윤실(19세) 등으로 거의 20대 청년들이 만세시위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유인물은 전도부인 김유의가 치마에 감추고 다니면서 모두 배포했다.

거사일 3월 18일 강화읍 장날 오후 2시가 되자 결사대가 앞장을 섰고, 시장 안 돌다리 부근에서 유희철은 ‘조선독립’이라 쓴 큰 깃발을 들고 관청리 쪽으로 행진했다. 시장 남쪽에서 조기신 황윤실 장명순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나아갔고, 수백 명의 군민들이 뒤따랐다. 유봉진은 백마를 타고 나타나서 시위전개를 지휘했다. “군청 앞에 모인 군중의 숫자는 5000~6000명이었으며, 시장에 가득 찬 총 인원은 1만명, 읍내에서는 전체적으로 2만명 이상의 시위대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때 경성지방법원 1심에 회부된 사람은 39명, 그 중 기독교인은 모두 26명이었다.

아! 제암리

일제는 비폭력 평화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기 시작했다. 총독은 조선군사령관에게 “군중에 대한 발포 살육탄압”을 지시했다. 특히 교회와 기독교인에 대한 폭압은 더 가중되었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에서 1000명의 기독교인, 천도교인, 농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어서 4월 5일 발안 장날 독립만세 운동에 제암리에 기독교를 들여왔던 안종후가 참여했고, 이후 제암리 기독교인들과 천도교인들은 ‘남포등’을 들고 지네산에 올라가 횃불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때 아리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일본 수비대(부하 11명, 순사 및 순사보)가 4월 15일 오후에 제암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마을 주민들을 예배당에 모이게 하고, 수비대는 교회당을 완전 포위하고 출입구와 창문을 큰 못으로 박아 도망하지 못하도록 한 채 무자비하게 집중사격을 가했다. 필사적으로 탈출하려던 사람들은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목이 베여 쓰러졌다.

안종환은 어린 아들을 살려달라고 창밖에 던졌는데, 군도로 내리쳐서 참살하였다. 그리고 시신 위에 석유를 뿌리고, 짚을 덮고 불을 질러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태웠다. 예배당도 불타 무너져 내렸다. 마을도 제암리 33가구의 집 가운데 외딴 집 2채만 남고 31채는 모두 불탔다. 이날 기독교 신자와 천도교 신자 30여 명이 희생되었다. 이러한 일제의 잔인무도한 만행을 언더우드(H. H. Underwood, 한국명 원한경) 선교사,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선교사 등이 찾아가서 사진을 찍고 취재하여 세계 여론에 고발하고 호소하였다.

3·1운동은 독립이라는 목표를 쟁취하지 못했지만, 실패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한국민의 독립의지와 민족적 자존감을 일본을 비롯한 세계만방에 선언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겨레의 독립의지를 고양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이 더욱 고무되고 조직화되었다. 이를 통해서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건국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3·1독립운동은 민족독립운동사의 분수령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주목해야 할 인물] 조국 독립 위해 살다간 신앙인 김마리아

신앙양심과 독립 열망, 최후까지 실천했다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한 김마리아.
2·8독립선언과 3·1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한 김마리아.

김마리아(1892~1944))는 2·8독립선언, 3·1독립운동, 대한애국부인회 활동, 신사참배 반대를 통해 신앙 안에서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그의 젊음을 산화시키며 살아갔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출신이다. 이곳은 소래교회가 있었던 마을이기도 하다. 부친 김윤방 부부는 소래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했고, 소래학교를 세워 기독교 인재양성에 힘을 쏟았다.

김마리아는 소래교회의 부속 소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이화학당을 다니다가 미국북장로교선교가 세운 정신여학교(연동여학교)에 입학하여, 1910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그 후 미국남장로교회가 세운 수피아여학교에서 3년간 가르치다가, 22세의 나이로 모교 정신여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었다. 그들과 구국기도회를 열었고, 밤에는 홀로 기도실에서 조국독립을 위해서 기도하였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김마리아는 재일조선청년독립단 단원으로서 민족독립을 준비하였다. 드디어 1919년 2월 8일 재일조선기독교회관에서 500여 명이 모여 그동안 준비한 독립선언을 했다. 당시 독립선언문은 백관수에 의해 낭독되었지만, 김마리아와 황에스더도 등단하여 일제의 만행을 신랄히 규탄하고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할 것을 호소하였다. 지도자급 학생들과 김마리아, 황에스더 등 70여 명이 동경 경시청에 연행되어 취조를 당하였다.

그녀는 독립선언서 사본을 허리춤에 감추고 귀국하여 부산 대구 대전 광주 봉산 서울 등지를 순회하면서, 3·1독립만세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그리고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서둘러 정신여학교에 도착하였고,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차에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과 수모를 당하고 중태에 빠져 5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출감했다. 이후에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애국독립운동을 하다가 또다시 참혹한 옥고를 치렀다.

그녀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뉴욕 비브리컬세미너리에서 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여전히 고문의 후유증이 있었지만 원산 윌손 여자신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했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1944년 3월 13일에 주님의 품안에 안겼다.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그녀는 자신의 52년 생애를 모진 고문의 후유증과 박해 가운데서도 신앙과 조국애를 실천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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