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환 박사(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오일환 박사(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오일환 박사(전 보훈교육연구원장)

2019년은 한국사에 있어서나 한국 기독교사에 있어서 아주 특별하다. 바로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이 두 역사적 사건은 이전의 한국 민족사에서 보지 못했던 현상이었다. 그동안 군주제 하에서 수동적이었던 ‘백성’이 국권을 상실한 일제 강점기에 주권의식을 갖고 ‘민중’으로서 민족적 자각과 함께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폭력 만세 시위운동으로 시작된 3·1운동은 일제로부터 민족해방의 과제를 성취하는 데는 실패했을지 모르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볼 때 민족해방운동사에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3·1운동은  일제에 대항하는 불굴의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함으로써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정치의식 및 사회의식이 크게 고양된 학생들과 노동자 및 농민들은 자주독립을 위한 민족운동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제각기 주체적인 학생운동, 청년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등의 형태로 민족운동에 적극 나섰다.

3·1운동으로 민족적 저력을 확인한 우리 민족은 이후 독립운동을 본격화했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 아래 암약해온 비밀결사 운동과 해외의 독립운동기지건설운동을 한 단계 더 강화하여 활발한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독립운동 사령탑으로서의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 무장투쟁과 국내에서의 민족실력양성운동이 그것이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이 더욱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민족운동으로 발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3·1운동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법통성과 정통성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동기부여를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1운동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공화주의 정부인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케 하는 동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근대 민족국가 건설의 시발점이 되었다. 두말할 필요 없이 3·1운동을 계기로 민주공화제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것은 국권 피탈 이후 단절된 역사적 정통성을 회복하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종전과 같은 군주제가 아니라, 민주공화제로 수립됨으로써 한국민족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다. 이는 오늘의 대한민국의 법통성과 정통성의 근간이 되었다. 특히 법통성과 관련해서는 현행 헌법 전문에서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3·1운동이 우리 민족이 독립에 대한 희망과 강한 의지를 가지고 끊임없이 독립을 추진하는 정신적 지주로 삼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광복 이후에도 통일한국을 위한 통합정신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더할 바 없이 크다. 

3·1운동의 주역들은 광복 후 미래의 대한민국이 단일의 민족국가로서의 독립국가이기를 바랐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광복과 함께 한반도는 분단이 되어 남한과 북한, 즉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되고 말았다.

우리는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던 이들이 꿈꾸었던 완전한 독립국가, 민주공화국으로서의 통일한국을 건설할 책무가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아직도 좌우 이념에 사로잡혀 번번이 남남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계층 간, 지역 간, 세대 간에도 갈등이 만연해 있다. 이로 인해 사회 곳곳에서는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양상이 지속되거나 심화된다면 분단 해소는 요원할 것이다. 그만큼 남북관계의 진전과 통일의 길이 멀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길도 3·1운동 정신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3·1운동 당시에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초과의무’를 질 줄 아는 자세를 견지하고 행할 때 그 길은 훨씬 단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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