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을 던지지 말고 청중과 함께 이야기로 풀어가라

‘설교의 플롯’ 강조한 유진 로우리, 시간적 흐름 속에 설교를 놓아 … “갈등구조 제시하고 더불어 진리 찾아가야”

●제목 : 역류(Swept Upstream)
●본문 : 마가복음 14장 1~10절
●설교 : 유진 로우리
●출처 : Richard L. Eslinger, A New Hearing: Living Options in A Homiletic Method에서 발췌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여느 때의 파티가 아니었습니다. 좋은 음식, 유쾌한 대화 그리고 마냥 즐거운 시간이 아니었죠. 죽음으로 치닫는 어두운 이별을 앞에 둔 저녁식사였습니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있고, 안에 모인 사람들은 슬픔을 이겨내려 애를 씁니다. 순간이 며칠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죠. 그들의 대화에는 대체로 농담이란 있을 수 없었고,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어색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눈을 마주치는 일마저도 거의 참기 어려운 순간이죠.

제자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했으며, 얼마나 감사히 여기고 있는지 보여줄 수 있는 가능한 모든 기회를 찾으려 했죠. 매우 긴 밤이 될 날이었습니다. 그 때였죠. 갑자가 한 여인이 불쑥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문을 두드리거나 저녁식사에 초대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무작정 들어온 것이었죠. 초대 받지도 않고 알려주지도 않은 채 말이죠.

예수님의 친구들은 이 괴기한 행동에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누군가 한 마디도 하기 전에 이미 그녀는 자신의 향유가 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의 친구들은 입을 모아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낭비하다니! 얼마나 값비싼 향유인데! 적어도 아홉 달의 월급을 모은 돈은 될 텐데. 왜 가난한 사람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한단 말인가!”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도 잠자코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한마디 하시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을거야. 분명히 예수님이 좋아하시는 우선순위에 대한 설교에 딱 맞는 기회가 온 거야.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고 하는 설교를 할 것임에 틀림이 없어.”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전혀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태도에 두 번 놀랐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대답하십니다. 주님은 확실하게 책망을 하십니다. 문제는 그 여자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에게 저녁을 초대했던 그들을 향한 책망이라는 것이죠. “그녀를 가만히 두어라!” 예수님이 외쳤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임박한 처형에 대하여 말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이 여자는 내가 장사되기 전에 미리 나의 몸을 향유로 부었느니라.” 세상에! 예수님께서 드디어 말씀을 하시고야 말았습니다. 너무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고도 참을 수 없는 그 진리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도대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그들도 최선을 다해 이 밤에 예수님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들이 그녀의 행동을 반대하는 진정한 속내를 이미 의심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이는 반응이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들이닥친 것 때문인지 혹은 그들의 위엄이 너무나 높아서인지 알지 못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께 보여준 호의는 대단한 것이고, 여인의 것은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모든 광경이 혼란이라는 말이 솔직한 표현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견에 쏠리다가 다시 저 의견에 끌리다가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반대하는 이유를 모르고 계실까요? 왜 사람들은 그녀가 하는 행동의 본질을 모르고 있을까요? 왜 예수님은 이렇게 낭비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계실까요? 왜 사람들은 은혜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까요? 왜? 왜?

그날 무엇이 그녀에게 이러한 일을 하게 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우리는 잘 압니다. 일찍이 예수님과의 강력한 만남이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논리적인 겉치레나 정연한 위엄은 사라져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 기름을 부을 일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녀가 누구인지조차 잘 모릅니다. 혹시 그녀는 예수님께 죄 용서를 받고 난 후 이전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난 막달리나 마리아였습니까? 아니면 억압 받던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가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자신이 결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쓰레기 같은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고 확신을 심어준 그 여인이었을까요? 우리는 이름은 물론이고, 다른 특별한 것도 그녀에 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녀는 벼랑 끝에서 밧줄의 마지막을 잡고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거기서 손을 내미신 분이셨습니다. 그녀는 거대한 벽을 만났고 예수님께서는 그 벽을 허물어 버렸습니다. 그녀는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생명으로 그녀에게 다가오셨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죠.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러나 사실입니다. 이제 축제를 즐길 시간이 된 거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아름다운 일을 행하였도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바로는 그 어느 때도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씀을 하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아니,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그녀를 기념하리라?” 누가 죽어야 할 사람이란 말입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나를 기념하라.” 그녀를 기념하리라니? 결국 입맞춤으로 배반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님 아니십니까?

그녀가 영광스럽고 감사한 기쁨으로 넘쳐 달려와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을 때 예수님은 이것이 그녀의 전 재산이란 것을 아셨습니다. 이 순간 축제에 감격해 하면서 쏟아 부은 것을 아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것이 자신을 기념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셨지만, 그 영예로움은 이제 그녀를 기리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더이상 드릴 것이 없었습니다. 결단코 더 적게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한 여인은 감사함으로 모든 것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슬프게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임박한 죽음을 의식적으로 기념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은 비록 죽음에 직면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다가오는 삶을 축하할 준비를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날 밤 모든 것을 바꾸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모든 것을 바꾸어 놓고 있죠.

오늘은 크래독과 함께 새로운 설교학을 주창했던 내러티브 설교의 대가인 유진 로우리의 설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한편의 드라마처럼 본문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그의 설교는 내러티브 설교의 좋은 모델이 될 것입니다.

이야기식으로 이끌어 가는 설교

이야기식 설교로 설교학계에 새로운 획을 그은 유진 로우리는 전통적으로 진행해 온 3대지의 설교형식을 거부하고 모든 설교를 플롯이 있는 이야기식으로 구성할 것을 주장합니다. ‘설교의 플롯’이란 기존의 개념적이고 공간적인 설교의 이해를 벗어나 시간적인 흐름 속에 설교를 놓은 것입니다. 마치 극작가가 하나의 영화를 만들어 내듯이 설교에 이야기의 흐름을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오늘 설교는 설교 전달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킨 유진 로우리의 설교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오늘 설교에서 로우리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만찬하는 자리에 갑자기 뛰어들어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붓는 여인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합니다. 이 여인의 예기치 않는 행동을 둘러싸고 분분한 사람들의 판단을 상상력을 통해 그림처럼 그려갑니다. 이야기식 설교는 내용의 흐름을 살려낼 뿐 아니라 설교를 실제의 상황처럼 대화로 구성하기도 합니다. 그의 설교는 마치 한 사람이 진행하는 모노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설교에서의 이야기는 전달에 절대적인 역할을 합니다. 동일한 내용이라도 개념적으로 전달하는 설교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오래 기억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로 구성되는 설교는 들을 때도 이해가 쉽고 기억에도 오래 남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그대로 드러낼 수만 있다면 이야기식 설교는 강단에 신선한 새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갈등을 제시하고 풀어가는 설교

유진 로우리는 설교에서 일정한 시기에 갈등을 조장하라고 조언합니다. 갈등은 설교의 긴장감을 증폭시키고 자연히 청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힘입니다. 로우리는 향유를 붓는 여인의 행동을 둘러싸고 예수님과 사람들의 엇갈린 반응에 초점을 모읍니다. 명제적으로 답을 던지는 해답이 아니라 마치 실타래를 풀어가듯 하나씩 청중과 더불어 풀어 나갑니다.

설교에서의 이러한 갈등구조는 여러 면에서 유익합니다. 갈등구조 자체가 삶이 안고 있는 다양한 문제를 잘 대변해 줍니다. 삶이란 것이 3대지처럼 조화롭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갖가지 갈등과 시련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갈등을 조장시키는 설교는 이런 점에서 본문에 나타난 문제를 나의 문제로 성찰하는 좋은 계기를 제공하며, 결국 이 설교가 나에게 들려주는 설교로 다가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크래독처럼 로우리도 설교에서 마지막 결론을 맺거나 적용하는 것은 거부하고 청중에게 맡길 것을 주장합니다. 물론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명쾌하게 설명되고 분명하게 적용되어 삶의 구체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합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