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학교 학술대회 … 이덕주 교수 “추진과정서 주도적 역할”

이덕주 교수는 “기독교학교가 100년 전 3·1운동의 주축이었다”고 강조했다.
이덕주 교수는 “기독교학교가 100년 전 3·1운동의 주축이었다”고 강조했다.

기독교학교는 3·1운동의 중심이자 민족운동의 산실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기독교학교정상화추진위원회와 영락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2월 21일 영락교회에서 전국 기독교학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이덕주 교수(전 감신대 역사신학)는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교 등 기독교학교 학생 대표들은 3·1운동이 추진될 때부터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면서 “이들은 독립선언서 배포와 학생 동원으로 3·1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뒷받침했다”고 주장했다.

전국 823개의 기독교학교들은 3·1운동의 진원지이자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다. 선교회가 설립한 기독학교와 교회 부속학교들은 복음과 근대교육을 확산시키는 한편 민족운동의 거점이 됐다. 이덕주 교수는 “지역마다 기독교학교들이 분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전국연락망 구축이 가능했다. 3·1운동에 기독교가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전국연락망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기독교학교 학생들은 일제의 탄압에도 만세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의 휴교령은 만세운동의 전국화를 가져왔다. “기독교학교 학생들은 휴교령으로 수업을 할 수 없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지방 만세운동의 주역으로 활약했다”고 말한 이덕주 교수는 “학생들은 고향 교회와 기독교학교 지도자들과 협의해 장날 때 만세시위를 벌였고, 일본의 진압이 과격해지자 지역 주민들과 야간 봉화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교회와 기독교학교가 설립된 지역에서는 만세시위가 일어나 전국적인 독립운동이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학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민족저항운동으로 상승했다. 특히 1920~1930년대 기독교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농촌계몽운동과 금주금연의 절제운동, 물산장려운동, 야학운동, 빈민운동, 신사참배 거부운동 등 다양한 민족운동으로 계승됐다.

기독교학교는 3·1운동을 계기로 엄청난 박해를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두 번째 발제자로 나선 임희국 교수(장신대)는 1919년 10월 4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제8회 총회 회의록을 분석해 일제의 박해를 증언했다. 당시 12개 노회 대부분은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운동 현장에서 죽거나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평북노회는 “중학교 교실 34칸이 일제 헌병과 경찰의 방화로 소실됐다”고 밝혔다. 산서노회에서는 만세운동에 동참한 중학생이 태형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기독교학교의 3·1운동 정신을 계승해 미래 100년의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임희국 교수는 “만세운동 피해 상황을 보고한 노회 자료를 보면 모두가 유관순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서 “일제 탄압의 압력이 가중될수록, 기독학교의 항일의식은 더 높아졌다. 이런 정신이 오늘날에도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세 번째 발제자로 나선 박상진 교수(장신대)는 “기독교학교는 신앙교육을 통해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했다. 현대 기독교학교들도 건학이념을 회복해 신앙교육을 실시하고 민족과 국가에 공헌할 수 있도록 자율성과 공공성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SNS 기사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