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태 목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수원 생명평화교회 목사)

만세운동은 가장 강력한 평화적 비폭력 저항이었다

김승태 목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수원 생명평화교회 목사)
김승태 목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소장.수원 생명평화교회 목사)

3·1운동은 그 준비단계부터 대중화, 일원화, 비폭력을 방침으로 하였다. 특히 비폭력은 당시로서 다소 생소한 투쟁방법이었다. 오늘날 ‘촛불혁명’과 같은 방식이다. 총칼 앞에서 두 손을 번쩍드는 행위는 서구인에게는 항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 우리 민족에게는 승리와 기쁨과 평화를 의미했다. 3·1운동에서 비폭력 평화운동 방식을 채택했다고 하는 것은 주동자들의 대단히 탁월한 선택이요 전략이었다. ‘비폭력 저항’은 인류 보편적 가치인 평화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도덕적 우위를 차지한다. 그래서 ‘정교분리’를 교리처럼 가르치던 선교사들도 이에 공감하고 지지하였다.

일제는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운동을 하는 민중들을 헌병·경찰과 소방대, 군대까지 동원, 증파하여 무력으로 무차별 탄압함으로써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체포 구금 고문하였다. 당시의 일본총리 하라 다카시(原敬)는 3·1운동 발발 열흘째인 1919년 3월 11일자로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에게 다음과 같은 탄압지시 전보를 보내 표리부동한 그들의 기만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번 소요사건은 안팎으로 표면상 극히 경미한 문제로 간주되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엄중한 조치를 취하여 장래 또다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며, 다만 조치를 취할 때 외국인이 주목하는 문제이므로 잔혹한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지 않도록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3·1운동이 처음부터 평화적 만세시위가 아니었으면, 이러한 일제의 탄압과 만행을 정당화시키고 선교사들은 물론 세계 여론의 지지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폭력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목숨을 걸고 불의와 억압에 맞서 평화적 만세시위를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만행에 중립 없다”(No Neutrality for Brutality)는 구호를 내세우며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탄압 만행을 비판하고, 우리 민족을 동정 지지하였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3·1운동이 비폭력과 평화의 방법을 택한 것은 탁월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국제 사회에 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2019년 3·1절을 맞아 경기도 화성 순국 순교의 현장 제암리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화성시 목회자와 성도들이 재현하고 있다.
3·1운동이 비폭력과 평화의 방법을 택한 것은 탁월했다.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우리 민족은 국제 사회에 독립의 의지를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다. 2019년 3·1절을 맞아 경기도 화성 순국 순교의 현장 제암리에서 벌어진 만세운동을 화성시 목회자와 성도들이 재현하고 있다.

그러면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인가? 성공을 운동의 목표나 이념의 성취로 본다면 절반의 성공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유, 정의, 평등, 평화와 같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이념으로 내세운 운동은 그 시도 자체가 가치가 있고 성공이기 때문에 실패가 없는 운동이다. 더욱이 우리 민족은 이 운동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충분히 알렸고, 비록 임시정부이지만 민주공화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를 기만적이기는 하지만 ‘문화정치’로 바꾸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더욱이 우리 민족 내부적으로는 이 운동의 참여를 통하여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의 의지를 분명히 알림으로써, 일제의 패망 후 독립 국가를 건설할 기초를 마련하였다.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임을 선언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맨손으로 평화적 만세시위를 벌인 역사적 사건이다. 시기적으로 좁게는 그해 5월 말까지, 넓게는 이듬해 3월 말까지, 공간적으로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우리 동포들이 이주하여 살던 만주·중국·일본·미주·하와이·러시아 연해주 등 모든 곳을 포함한다. 시위 규모는 달랐지만, 그해 5월 말까지, 50명 이상이 참여한 시위만 하더라도 1500여 회가 넘었고, 참여한 연인원은 202만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우리 인구가 1800만에서 2000만명이었으니까 총 인구의 10%이상이 만세시위에 참여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우리 민족은 이 역사적 사건에 자발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났다. 3·1운동의 결과 중국 상하이에서 민주공화정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탄생했고, 비로소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를 꿈꾸고 연습하게 되었다. 국왕이 통치하던 전근대적인 제국(帝國)의 신민(臣民), 식민지배를 받는 피압박 민족에서 근대적인 민주공화국의 국민(國民)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3·1운동이 ‘3·1혁명’으로도 불리는 이유이다. 해방 때까지 독립운동가들은 ‘3·1혁명’으로 불렀고, 3·1운동이 일어난 당시에도 북감리회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이나 캐나다장로회의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같은 선교사들은 이를 “한국 혁명”(Korean Revolution)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 ‘혁명’은 아직까지도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3·1운동에서 추구하였던 이념 내지 정신이 아직도 이 땅에 온전히 실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3·1운동의 이념 내지 3·1정신은 크게 세 가지다. 자주독립(自主獨立, liberty and independence)·정의인도(正義人道, justice and humanity)·평등평화(平等平和, equality and peace)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 된 민족을 전제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현 분단체제가 극복되지 않는 한 결코 온전히 성취될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도 사회정의도 평화통일도 3·1정신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역사적 과제를 해결해야 비로소 ‘3·1혁명’이 완성되는 것이다.

3·1운동의 이념인 자주독립 정의인도 평등평화는 자유 정의 평등 평화로 요약될 수 있고, 이것은 인류 보편적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3·1운동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 권리장전이자 인권선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나서 1948년 12월 유엔(국제연합) 총회에서 제정한 세계인권선언의 전문에서는 “인류사회의 모든 구성원의 고유의 존엄성과 평등하고 양여할 수 없는 권리를 승인함은 세계에 있어서 자유 정의와 세계평화의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천명하였다. 이것을 우리 민족은 이미 그 30년 전인 1919년 3·1운동에서 천명하였고, 그 실현을 위한 행동에 자발적으로 거족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래서 3·1운동을 주동하거나 참여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행동은 정의인도에 따른 정당한 것이며, 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법정투쟁을 벌였다.

3·1운동에는 우리 민족 전 계층이 자발적으로 참여했고, 참여하면서 그들의 의식이 변화되었다. 전근대적 굴종의식이 사라지고, 근대적 권리의식, 저항의식, 시민의식이 생겨난 것이다. 정치의식에서도 과거의 복벽주의(대한제국 재건)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정(대한민국임시정부)을 수립하려는 의식이 지배하였다. 이것은 3·1운동이 우리 민족이 근대적 민족으로 거듭난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미북감리회 한국선교부를 책임지고 있던 웰치 감독(Bishop Herbert Welch)은 그해 여름 미국에 건너가 그곳 교계신문인 <The Christian Advocate>에 ‘1919년 한국 독립운동’이라는 글을 1919년 7월 24일자부터 4회에 걸쳐 게재하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한국독립운동은 정말 민족 운동이다. 비록 북부가 특히 첫 주 동안 더 공공연하게 관여되었지만, 그것은 어떤 종교 단체에 국한되지 않았으며, 어떤 한 사회 계급-양반들, 학생들, 전도자들, 농부들, 노동자들, 소상인들에 국한되지 않고, 일본의 지배에 항의하는 그들 자신의 독특한 방식을 따랐다. 그것은 한 성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여성들이 자유롭게 행동과 고난 둘 다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린 여학생들도 놀라운 담력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삶의 어떤 기간에도 제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 인구, 고령자에서 초등학교에 있는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이 운동에서 그들의 자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젊고, 늙고, 부유하고, 가난하고, 좋거나 나쁘거나, 교육받거나 무지한 사람들은 주목할 만하고 전례 없는 민족적 통합에 동참했다. 이 운동에서 사람들이 변한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또한 주목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그들은 다소 오해를 살 만한 온화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들의 마음은 뜨거웠지만, 그들은 겁에 질려 있고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이 봉기가 시작되면서, 공포에서 대담함으로 바뀌는 것이 나타났다. 그들의 선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는 약하지 않고, 두려움이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이상과 희망을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울 것이다.’ 남자들, 여자들,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들에게 어떤 처벌이 닥쳐도 감당한 준비로, 위축되지 않고 법의 집행관들과 대면했다. 그들의 용기, 끈기, 독창성, 보여준 조직력은 가장 오래된 선교사(웰치 자신)에게는 놀라운 것이었다.”

또한 3·1운동은 한국교회의 정치와 현실 참여의 좋은 모델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국 기독교인들의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3·1운동 참여와 역할은, 우리 역사에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와 현실 또는 역사적 과제 해결에 직접 뛰어들어 큰 기여를 하였다.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계획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은 자신들의 권익을 신장하기 위해서나, 권력의 헤게모니를 잡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순수하게 우리 민족의 해방 독립을 바라서 자신을 희생하고 민족의 선두에 서서 일제에 항거하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거사 후의 그들을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를 생각지 않았고, 종파나 계급적 이익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것을 이들의 한계로 지적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그들이 얼마나 순수하게 이 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나를 실증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한국의 기독교인 수는 100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적 과제인 민주화운동과 사회정의운동, 평화통일운동을 가장 앞장서 이끌어 가는 이들도 기독교인이요, 이에 못지 않게 이러한 운동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3·1운동을 새롭게 인식하고 거기서 역사적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종교적 이념을 초월하여 타 교파는 물론 타 종교계까지도 포용하고 협력하였던 당시 기독교계 지도자들,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민족의 독립과 자유, 정의와 평화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과감하게 일어섰던 믿음의 선배들, 이들이 가졌던 3·1정신이야말로 현재 우리의 민족사적 과제인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절실히 요구되는 정신이다. 이러한 역사의 맥락에서 볼 때 기독교인들의 현실 참여와 역사 참여는 결코 정치적 문제만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는 신앙의 문제요,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이웃에 대한 책임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정신사적으로는 우리 역사에서 아직도 미완성인 운동인지도 모른다.

한국교회는 올바른 3·1운동의 인식을 통하여 이 운동의 이념을 지속적으로 활성화시키고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우리 민족의 자주적 민주화와 평화적 통일 등의 역사적 과제 해결과 역사 발전에 앞장서 기여해야 할 것이다. 3·1운동의 참여와 역할은 우리 민족 모두에게,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민족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봉사한 자랑스러운 전통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기념될 것이다. 그리고 3·1운동에 대한 이러한 기억은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이를 돌파할 새로운 영감과 용기를 주는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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