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하라!’ 이렇게 출발한 103회 총회의 반환점이 보인다. 항상 총회가 끝나면서 새로운 출발의 의지를 보여주지만 좌절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나마 이번 회기에선 두드러진 변화들이 나타나는 것 같았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상태는 아니다.

왜 그럴까?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구조적으로 변화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오랜 관행과 흐름을 바로 잡겠다는 의지를 찾기 어려울 뿐 아니라 임기 1년이라는 물리적 한계도 그렇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라면 여러 분야에서 누군가는 그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데 그 벽을 헐어내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변화는 말이 쉽지, 내 것을 내려놓는 손해와 그로 인한 불편함을 감수할 각오를 하지 않는다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몇 사람이라도 확고한 의지를 가지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것은 역사가 증명해 왔다.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역사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셀마>라는 영화에서도 잘 그리고 있지만 대부분의 흑인들은 미국에서 흑인이 평등권을 보장받는 것이 불가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100년 전에 노예해방이라는 변화가 있었지만 여전한 차별은 절망만 안겨주었다. 그러나 킹은 도전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란 연설이 그러하듯 꿈을 품고만 있지는 않았다. 목숨을 걸고 행동했고 결국 해냈다.

2000년 전에도 주님은 오랜 전통과 뿌리 깊은 부조리에 도전하셨다. 그 분은 율법의 깊은 의미를 가르쳤고 십자가로 행동하며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 그러나 과거의 틀에 갇힌 채 변화를 거부하고 또 변화하려는 자들을 밀어내는 완고함은 여전했었다.

십자가를 앞두고 높은 산에 오르신 주님은 하늘의 모습으로 변화하신 기록이 있다. 변화를 위해서는 높이 올라야만 가능하다는 메시지는 아닐지? 그런데 우리는 오르지 않은 채 산 아래 머뭇거리며 변화의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는 것인지 모른다. 올라야 변화산이 된다. 오르지 않는 그 산은 장애물일 뿐이다.

마틴 루터 킹, 몸부림을 통해 변화를 만들었지만 그는 죽었다. 변화를 거부하는 세상은 그를 저격했다. 그렇게 킹 목사를 죽일 수 있었지만 이미 시작된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거꾸로 돌지 않는다. 그 변화의 결과 오바마 대통령을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킹’은 누굴까? 누굴 킹으로 내세우고 싶은가? 그리고 그런 ‘킹’이 앞선다면 뒤따를 준비는 되어 있는가? 그 행진에 동참할 수 있는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것이면 불평하는 입도 다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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