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⑥ 평양을 뒤흔든 기독인의 함성
[역사기획/ 3·1운동 100주년 태극기 삼천리 만세강산] ⑥ 평양을 뒤흔든 기독인의 함성
  • 기독신문
  • 승인 2019.02.1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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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 우선한 애국 교인들, 강력한 만세운동 주도하다
서울 탑골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평양 3·1운동을 묘사한 부조. 평양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했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식에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선포했다. 공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진들의 신앙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 신앙이다.
서울 탑골공원에 설치되어 있는 평양 3·1운동을 묘사한 부조. 평양 3·1운동은 기독교인들이 주도했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식에서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선포했다. 공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선진들의 신앙은 오늘날 한국교회가 본받아야 할 신앙이다.

1919년 3월 1일 평양에서도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선포하고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은 총 9곳인데, 그 중 7곳이 현재 이북지역이다. 서울 고양과 더불어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해주의 열사들은 민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거리로 나섰다.

이처럼 이북지역에서 3·1운동을 선제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배경은 민족대표 33인 중 다수가 평양 정주 의주 선천 등 이북에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 정주장로교회 김병조 목사 이승훈 장로, 정주덕홍장로교회 이명룡 장로, 신의주 동장로교회 유여대 목사, 선천 북장로교회 양전백 목사 등이 바로 그들이다.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3월 1일에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를 했던 곳은 한결 같이 거사 전 주도자들의 조직과 철저한 준비가 있었던 곳이다. 평양 의주 등 이북지역의 3·1운동은 유여대 목사와 이승훈 장로 등이 직접 준비하고 지휘하여 독립선언식을 이끌었다”며, “만세시위를 하며 합창한 독립창가는 사전 준비 없이는 부를 수 없는 노래였다”고 설명했다.

특히 평양은 서울과 함께 가장 강력한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다. 평양 3·1운동을 주도한 장로교회, 감리교회, 천도교가 각각 숭덕학교, 남산현교회, 설암리 교구당에서 동시에 독립선언을 선포했다.

장로교회는 3월 1일 오후 1시 평양 숭덕학교 운동장에 1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고종황제 봉도식과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사회를 맡은 장로회 총회장 김선두 목사는 고종황제 봉도식을 축도로 마친 후, 베드로전서 3장 13~17절과 로마서 9장 3절을 읽어나가며 평양 3·1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이어 서문회교회 정일선 전도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산정현교회 담임 강규찬 목사는 연설을 통해 민족 독립을 향한 결연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자 윤영삼의 인도로 태극기를 손에 든 1000여 명의 참석자들은 한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대한독립만세!” 삼창을 외쳤다. 이어 강규찬 목사를 선두로 거리행진에 나섰고, 감리교인과 천도교인들도 합류해 평양 시내는 만세 물결을 이뤘다.

한번 솟구친 만세 물결은 이날로 그치지 않았다. 평양의 교인과 시민들은 일제의 총칼에 맞서 3월 5일까지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이에 일제는 주동자 체포에 돌입해, 김선두 목사 강규찬 목사 정일선 전도사 등 대한독립을 부르짖은 열사 수백명을 검거했다.

평양 등 이북지역의 3·1운동에서 주목할 점은 기독교인이 주도했을 뿐 아니라, 독립선언식에서 말씀과 찬송이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에 의한 기독교식 거사가 평양 등 이북지역을 뒤흔들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당시 이북지역에 자리 잡은 교회 조직과 기독교 기관에서 배출한 인물들이 있었다.

김승태 소장은 “이북지역은 교회 조직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장로교는 당회 노회 총회로 이어지는 조직, 감리교는 구역회 지방회 연회로 이어지는 조직이 있어 3·1운동의 통로가 됐다”며, 또한 “이북지역에는 기독교 기관에서 배출한 지도력을 갖춘 쟁쟁한 목회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민족대표로 3·1운동 선봉에 섰을 뿐 아니라, 평양신학교 선후배 사이로 신뢰할만한 인맥을 형성해 거사를 이끌 수 있었다”고 밝혔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돌아보면 100년 전 믿음의 선진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민족 해방을 위해 일제와 맞섰다. 반면 오늘날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고 국가 과업에 동참하는지 묻는다면 물음표를 던질 수밖에 없다.

김승태 소장은 “선진들의 신앙은 사사화되지 않고 공공성을 띠고 있었다. 개인의 안녕과 출세보다 교회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성경에 있는 대로 의와 복음을 위한 고난을 축복으로 여겼다”면서, “반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신앙은 사사화되고 개인주의화되고 개교회주의화되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소장은 3·1운동 100주년을 계기로 한국교회가 초기 교회의 신앙을 회복하고, 기독교인들이 3·1운동을 모델로 사회정의운동과 평화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길 당부했다. 기독교인이라면 100년 전 민족과 나라를 위해 희생했던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며 깊이 새겨야 할 조언이다.

평양산정현교회, 민족해방운동 중심에 서다

기독교인이 이끌었던 평양의 3·1운동에서도 평양산정현교회와 강규찬 목사는 주역 중에 주역이었다.

3·1운동으로 시작해 물산장려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이르기까지 일제 강점기 내내 민족운동을 선도했던 평양산정현교회, 1917년 제4대 담임 강규찬 목사 청빙이 그 계기가 됐다. 총신대 박용규 교수가 펴낸 <강규찬과 평양산정현교회>에 민족과 함께한 교회와 목회자의 행보가 자세히 기술돼 있다.

강규찬 목사 (사진출처:박용규 저 〈강규찬과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 (사진출처:박용규 저 〈강규찬과 산정현교회〉)

강규찬 목사는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 시절부터 민족정신을 가르쳤던 교육자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의 손길에서 백낙준 박형룡 정석해 등 교계 지도자가 배출됐다. 하지만 일제가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조작한 105사건으로 투옥돼 2년간 옥고를 치른다. 출옥 후에도 일제의 감시를 받던 강규찬 목사는 신성중학교를 사임하고 1913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1917년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서울 산정현교회 김관선 목사는 “당시 평양산정현교회는 평양의 지식인들이 모이는 교회로 자리 잡아가는 상황이었다. 그 시점에서 강규찬 목사 청빙은 평양산정현교회가 평양지역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시의적절한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100년 전 평양산정현교회 전경.
100년 전 평양산정현교회 전경.

강규찬 목사 부임 이후 평양산정현교회는 성장을 거듭했다. 재적교인은 600명 출석교인은 400명에 달했고, 주일공부반이 28개에 이를 정도로 성경공부에도 집중했다. 특히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던 강규찬 목사의 설교는 평양의 청년과 학생들을 교회로 모이게 했다.

이윽고 1919년 3월 1일, 평양산정현교회는 민족 독립을 위해 투신한다. 강규찬 목사를 비롯해 김동원 장로 평신도 조만식이 평양 3·1운동을 준비했고 거사 당일에도 평양산정현교회는 역사의 현장 중심에 섰다. 특히 강규찬 목사는 민족 해방을 부르짖은 강력한 연설로 참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선봉에서 만세 행렬을 이끌었다.

곧이어 일제에 체포된 강규찬 목사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상해로 망명을 떠났다가 체포된 조만식도 평양형무소에 수감된다. 그런데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도 강규찬 목사는 무려 95명이나 전도했다고 한다. “팔도를 다니면서 전도하기를 원했는데 감옥에 갇히므로 찾아다니지 않고 전도할 수 있음을 감사한다”고 했던 일화에서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평양산정현교회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로 적잖은 피해를 입었으나, 편하설 선교사와 장로 등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역경을 극복해나갔다. 그리고 14개월의 옥중생활 끝에 출소해 다시 강단에 선 강규찬 목사. 그는 첫 설교에서 디모데후서 2장 9절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라는 말씀으로 교인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다고 한다.

김관선 목사는 “3·1운동을 주도한 결과 평양산정현교회는 큰 시련이 있었지만, 교회는 그 시련을 이겨낼 만큼 강했다. 이후 교회는 보다 많은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사회적 민족적 책임을 감당했다”고 말했다.

3·1운동 이후 평양산정현교회 교인 조만식 김동원 오윤선 유계준 등은 민족지도자로 성장한다. 또한 평양산정현교회는 조만식이 총무로 있던 평양YMCA와 함께 물산장려운동 농촌계몽운동 기독교문화운동에 앞장섰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일사각오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으로 시무한 곳도 평양산정현교회였다.

오늘날 서울 산정현교회의 모습. 선진들이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것처럼 서울 산정현교회도 북한과 일본의 신앙적 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오늘날 서울 산정현교회의 모습. 선진들이 민족해방운동에 헌신한 것처럼 서울 산정현교회도 북한과 일본의 신앙적 해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 2006년, 서울 산정현교회는 설립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예배당을 지었다. 아울러 북한선교는 산정현교회의 오랜 주요 사역 중 하나다. 100년 전 민족의 자유를 위해 희생했다면, 현재는 북한과 일본의 신앙을 통한 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김관선 목사는 “선진들의 유산을 잇기 위해 북한과 일본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민족의 암흑기와 유사하게 영적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북한과 일본이 자유함을 얻고 회복할 수 있도록 선진들이 앞서 일러준 길을 걷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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