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과 적용 열어둔 이야기식 설교는 힘이 큽니다

크래독의 상상력은 청중 태우고 본문 여행하는 타임머신 … 설교자는 말씀에 근거, 명확한 결론 제시해야

●제목 : 출석을 부를 때(When the Roll Is Called Down Here)
●본문 : 로마서 16장
●설교 : 프레드 크래독
●출처 : Mark Barger Elliott, Creative Styles of Preaching

설교본문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전 총신대 교수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여러분의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는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흥미로운 본문이 아닙니다. 이름이 쭉 열거되어 나오는데요. 그것도 이상한 이름입니다. 설교학 수업에 학생들에게 늘 이렇게 말합니다. “성경에서 설교 본문을 정할 때 이름이 나열된 것은 피하세요. 이런 본문은 정말 다루기 힘듭니다. 이런 본문 설교하지 마세요.” 마치 바울이 출석을 부르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자체가 이상한 일이지요. 저는 단 한 번도 어떤 사람이 일어나 출석을 부르는 교회에서 예배해 본 일이 없습니다. 정말 지루한 일 아닙니까? 아니, 어쩌면 좀 재미있는 일이 될 것도 같습니다만.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시지는 못하겠지만 이 목록에는 남편과 아내가 나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죠. 루포와 그의 어머니도 나오고, 드루베나와 드루보사도 나오고요. 나이가 지긋한 에베네도도 나오죠. 참 재미있는 교회 명부 아닙니까? 처녀 마리아도 있고요. 그때는 핵가족이라고는 거의 없었죠.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함께 부르셨기 때문이죠. 어쨌든 참 재미있는 목록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하나의 목록이 아닙니다. 바울은 지금 짐을 싸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있는 가이우스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가이우스는 자신과 고린도교회 식구들을 초대한 사람이죠. 바울은 이제 막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있는 서쪽으로 떠나갈 참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바울은 아마도 59세쯤 되었을 겁니다. 바울은 자신이 해야 할 또 하나의 사역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59세나 된 사역자를 원하는 교회는 없겠지만 당시 교회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교회를 시작한 이가 바로 바울이었기 때문이죠. 쌀 짐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코트 한 벌, 책 몇 권, 그리고 잡동사니가 전부였습니다. 짐을 가볍게 하려고 이것저것 버리던 중 바울은 메모해 둔 것과 편지 한 묶음을 발견합니다. 그리곤 싸던 보따리들 틈에 주저앉아 기억을 더듬어 갑니다. 그러니 이 이름들을 두고 그냥 목록이라고 불러서는 안 되겠지요.

여러분들도 저에게 그렇게 하신 적이 있지요. 제 아내와 제가 신학교 시절 학생교회에서 목회를 마감할 때 교인들이 마지막 주일 저희에게 선물을 하나 주셨습니다. 교회의 한 여성도가 수를 놓은 침대보였는데 맨 위에 교인들 이름을 하나씩 새겨 놓았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침대 위에 올려다 놓고 기억을 더듬었지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남겨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제 사례비 인상에 반대하며 다른 사람들까지 설득하려 했던 체스터씨, 우리 차에 새 타이어를 갈아 끼워 주었던 마리아와 요한 부부, 매우 말이 없던 사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로이 그리고 그의 아내 마리. 술만 먹으면 난폭해지는 남편과 살면서도 항상 신실하고 쾌활함을 잃지 않았던 놀라운 여인 로이스. 우리가 부임했을 때 그 남편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죠. “여보 기억해요. 그게 우리가 집례한 첫 장례식었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불 위에 수놓아진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립니다. 어찌 이를 단순한 출석부라고 하겠습니까?

바울이 말합니다. “출석부라니 말도 안 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그들은 저를 위해 목이라도 내어 놓았던 사람이죠. 안드로니고와 유니아, 이들은 우리와 함께 투옥된 사람들이죠. 정말이지 대단한 그리스도인들이죠. 마리아도 있군요. 정말 열심히 섬겼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만둘 때도 그녀는 끝까지 남았죠.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바울 선생님, 이제 집으로 돌아가세요. 뒷정리는 제가 할게요. 찬송가를 정돈하고 떨어져 있는 주보를 줍고 의자를 가지런하게 맞출게요. 어서 집으로 돌아가세요. 피곤하실 텐데요.’ ‘마리아, 피곤하긴 자매도 마찬가지잖아요?’ ‘맞아요, 그래도 선생님은 내일 아시아로 전도여행을 떠나셔야 하잖아요. 어서 가세요. 뒷일은 저에게 맡기세요.’ 그녀는 정말이지 열심이었습니다.”

“에베네도, 제 설교에 처음으로 회심한 사람이지요. ‘주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한 사람이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날 밤 감사하느라 한숨도 못 잤죠. 얼마나 감격스런 날이었던가! 드루베나와 드루보사. 당연히 쌍둥이죠. 여러분도 이들의 이름에서 느껴지시죠? 드루베나와 드루보사. 이 둘은 언제나 이 자리에 앉았죠. 주일마다 파란색 옷을 입고 왔고요. 저는 그들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죠. 둘 중 한 사람은 볼에 사마귀가 있는데 그가 드루베나인지 드루보사인지. 제대로 알아보질 못한 거죠. 그리고 루포. 루포에게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의 어머니에게도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그녀는 저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 아닙니까? 어떤 여인이기에 사도 바울에게 ‘어머니’란 칭호를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바울은 아마도 그녀의 집에 머물렀겠죠. 그녀는 약간 몸집이 커보였던 것 같습니다. 언제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고요. 앞치마에는 별것이 다 들어있고 머리는 뒤로 넘겨 한 다발로 묶은 모습이었죠. 아침상을 거나하게 차려 놓습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서둘러 가야 합니다.” “앉아서 밥이나 드세요. 당신이 사도든 아니든 난 상관이 없으니 어서 밥이나 먹어요.” “나의 어머니에게 안부를 전해 주시오.” 이를 어찌 그냥 출석부라고 하겠습니까?

사실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이름들은 바울에게 대단히 특별한 이름입니다. 바울은 지금 “안부를 누구에게 전해 주시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는 지금 작별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로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로마로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 가야합니다. 적의 소굴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그래서 15장 마지막에 바울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부탁합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제가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도록 저와 함께 고민해 주십시오.” 이것은 단순하게 이름을 나열한 것이 아니지요.

여러분, 종이 한 장씩 꺼내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주보를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여백이나 주보 아래에 이렇게 써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기억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름을 써 보세요. 여러분 스스로 이름을 골라 보세요. 기억나는 이름이 있지요? 이제 다른 이름을 써 보시고 또 생각나는 다른 이름을 써 보세요.

여러분 이름을 다 쓰셨습니까? 한 사람이건 두 사람이건 다 쓰셨겠지요? 이름을 간직하고 계십시오. 그 이름을 꼭 지니고 다니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단순한 하나의 목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다음에 이사를 하시더라도 그 이름을 지니고 계십시오. 여러분이 타시던 차를 버리고 책과 가구를 버리고 타자기와 모든 것을 버린다 하더라도 그 이름은 간직하고 계십시오. 여러분의 땅 위에서의 사역이 끝나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이름을 가지고 가십시오.

제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확실히 아는 것이 있습니다. 천국 문에 이르면 베드로가 물어볼 것입니다. “세상에 갈 때 빈손으로 갔는데 빈손으로 오셨지요. 뭐 가지고 온 것이라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말씀하십시오. “뭐 별것은 아니지만 몇 사람들의 이름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 한번 봅시다.” “그저 이 사람들은 저와 함께 일하기도 하고 저를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에 불과합니다.” “한번 보여 달라니까요.” “만일 이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말할 것입니다. “그 이름을 꼭 보고 싶습니다.” 비로소 베드로는 큰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저도 이 사람들을 다 압니다. 사실 제가 이곳으로 오는 길에 한 무리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붉은색으로 거대한 푯말을 길가에 세워놓았는데 이렇게 쓰여 있더군요. ‘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은 새로운 설교학의 포문을 연 크래독의 설교를 실제 들어보았습니다. 

이야기를 통해 본문을 체험시키는 설교

크래독의 설교를 듣고 있으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면 청중은 설교자에게서 눈을 떼기 어려워집니다. 청중을 완전히 압도하는 전달력, 그것은 이야기가 내포하는 힘에서 나옵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름이 나열된 로마서 16장에서 크래독은 각 사람의 이름을 토대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창조해 냅니다. 이런 이름들은 단순하게 나열된 출석부 같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사역에 소중한 흔적을 남긴 하나님의 사람이란 것을 이야기식으로 풀어냅니다.

이야기식으로 본문을 전달할 때 첫째, 둘째처럼 대지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이야기식으로 구사할 뿐 아니라 알맞은 예화로 청중이 경험하도록 인도합니다. 청중과 하나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이야기식 설교가 지니는 힘입니다.

상상력을 통해 본문을 탐구하는 설교

로마서 16장 설교에서 크래독의 상상력은 청중을 태우고 본문의 세계로 여행하는 타임머신과 같습니다. 상상력이란 본문의 행간을 읽어냄으로써 당시의 상황을 재구성하여 눈 앞에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표현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은 설교에서 뼈대와 같은 본문에 살을 붙여 살아있도록 만들어 내는 힘으로 여겨집니다. 크래독은 상상력의 대가라 할 만큼 본문에 나타난 사람들 각자의 삶을 당시의 상황 속에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드라마처럼 보여준다.

설교자는 행간의 글을 상상력이라는 나래를 펼쳐 읽어내야 합니다. 상상력의 허용범위는 어디일까요? 본문의 의미를 높이고 본문이 말씀하는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은 청중의 손에

그의 설교학 이론처럼 오늘 설교에서 크래독은 설교의 결론을 내리거나 구체적으로 청중에게 적용하거나 촉구하지 않고 끝을 냅니다. 설교를 미완의 느낌이 나도록 남겨두면서 청중에게 여운을 남기고 청중이 결론과 적용에 동참하게 마지막을 열어 둡니다. 하지만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명확한 결론과 적용을 제시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용 없는 설교란 마치 목표물 없이 날아가는 화살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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