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청년들의 독립의지, 3·1운동에 직접 영향 미치다

이순자 책임연구원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이순자 책임연구원,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8독립선언은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재일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낭독함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였다. 이 사건은 올해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독립선언운동이며, 도쿄 유학생들에 의해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이 날의 운동은 재일유학생들이 하루 아침에 감정적, 즉흥적으로 일으킨 일이 아니라 사전 배경이 되는 상황들이 있었다. 즉 동경에 있는 재일본 유학생들은 일찍부터 유학생활에서 서로간에 친선을 도모하고 학문을 권할 수 있는 유학생 조직을 형성하였다. 당시 한국인 일본 유학생들은 계속적으로 증가하여 전체 재일교포 1만4500여 명 가운데 유학생이 590여 명이었다.

일찍이 일본에서는 한국인 동경유학생의 최초 모임인 ‘대한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를 비롯하여 출신지역별 다양한 모임이 있었는데, 1912년 10월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일명 학우회)로 통합 결성하였다. 학우회는 임시총회 및 웅변회, 졸업생 축하회, 신입생환영회, 운동회 등을 통해 배일사상을 다져나갔고, 1914년부터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1년에 두세 차례씩 발간하여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이처럼 재일 유학생들은 웅변회, 토론회 등을 통해 식민지 조국의 독립문제를 고민하며 민족사상을 보다 심화시켜 왔던 것이다.

이러던 중에 고베(神戶)에서 영국인이 발행하는 <The Japan Advertiser> 1918년 12월 15일자에 “한국인, 독립을 주장”(Korea, Avitate for Independence)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19년 1월 18일부터 열리는 파리강화회의에 재미 한국인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贊鎬)·정한경(鄭翰景)이 미국 윌슨 대통령이 선언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하여 한국 문제를 해결해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1918년 12월 한국대표로 파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를 접한 재일유학생들 사이에서는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고 민족자결을 요구하는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반영시키기 위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일본 국회에 보낼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만들었던 재일유학생대표들의 모습.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독립선언운동이며 도쿄 유학생들에 의해 일제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및 일본 국회에 보낼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만들었던 재일유학생대표들의 모습. 2·8독립선언은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독립선언운동이며 도쿄 유학생들에 의해 일제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학우회 유학생들은 1918년 12월 29일 메이지(明治)회관에서 열린 망년회와 1919년 1월 6일 동경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웅변대회를 통해 이러한 여론을 가시화시켰다. 특히 웅변대회에서 연사로 나선 윤창석·서춘(徐椿)·이종근(李鍾根)·박정식(朴正植)·최근우(崔謹愚)·김상덕(金尙德)·안승한(安承漢)·전영택(田榮澤) 등은 “현하의 정세는 우리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가장 적당한 시기이며, 해외동포들도 이미 각각 실행운동에 착수하고 있다. 우리도 마땅히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여 장내를 흥분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이날 웅변대회에서는 독립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이 갈려 밤이 늦도록 토론이 계속되었다.

유힉생들은 실천방법으로 임시실행위원을 선출하여 이들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했다. 최팔용·전영택·서춘·김도연·백관수·윤창석·이종근·송계백·김상덕·최근우 등 10명이 임시실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전영택이 신병으로 사임하고, 이광수와 김철수가 합류하여, 결국 11명으로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결의문 및 일본 국회에 보낼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만들었는데, 이광수가 기초문을 작성하였다. 송계백이 국내로 들어와 한글 활자와 인쇄기 및 운동자금을 구하고, 최린·현상윤·최남선 등과 만나 재일 유학생의 거사에 호응하여 국내에서도 궐기할 것을 요청했다.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경 임시실행위원들은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과 일본 국회의원, 조선총독부, 그리고 도쿄 및 각지의 신문사와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한 다음, 오후 2시부터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학우회 임원선거를 명목으로 유학생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모임에는 동경 유학생을 거의 망라한 600여 +명이 참가했다. 시간이 되어 회장 백남규가 개회를 선언한 다음 최팔용의 사회로 대회 명칭을 ‘조선독립청년단대회’로 바꾸고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순서에 따라서 백관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재빨리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이날의 독립선언회의에서 유학생들은 독립실행방법을 토의하려 했으나 니시간다[西神田] 경찰서장이 강제해산을 명령하였고, 흥분된 학생들이 순식간에 일어나면서 고함을 치며 서로 때리고 맞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이미 국내로 들어간 이광수·최근우를 제외한 서명자 9명 등 모두 27명이 즉석에서 검거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구두를 신을 틈도 주지 않은 채 맨발의 청년들을 경찰서까지 질질 끌고 갔다. 이때는 1919년 2월 8일 오후 3시 50분이었다.

독립선언서의 서명자들만 히비야(日比谷) 경찰서로 구치되었다가 2월 20일 도쿄 지방재판소 검사국에 송치되고 나머지 학생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일제는 수감된 대표자 9명에 대해 6개월 동안 2심까지 재판을 끌고 갔다. 검사는 선언서 가운데 ‘혈전’(血戰)이란 용어 등을 문제삼아 내란죄로 기소하려 하였다. 하지만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여론에 밀려 일제 검찰은 출판법 위반의 죄명으로 2년의 금고형을 구형하였다. 그후 1919년 6월 26일 재판부는 최팔용ㆍ백관수ㆍ김도연ㆍ윤창석에게 각각 9개월의 금고형, 김상덕 등 나머지 5인에게는 7개월 15일의 금고형을 선고하였다. 이들이 비교적 ‘가벼운’ 형을 받은 것은 3·1운동의 혜택을 본 셈이다. 대표위원 9명은 무죄 석방의 가망이 없음을 알고 그대로 복역해서 하루라도 빨리 출옥하기 위해서 공소를 포기하였다. 그때부터는 사식이 끊어지고 면회도 극히 제한되어 백남훈 총무가 한 달에 한번씩 9인을 면회하였고 책도 차입하여 주었다.

이들은 감옥에서 그해 12월 25일 성탄절을 맞이하였다. 신앙심이 있었던 이들은 함께 모여 성탄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해달라고 간수에게 요청하였다. 간수는 성탄절에 친구들끼리 한번 모이는 것은 괜찮겠다고 생각했으나 모여서 독립을 모의할 듯하여 모이되 간단히 기도회만 가질 것이며, 모두 일본말로 하는 조건을 붙여 모임을 허락하였다.

“피끓는 청년투사들에게 기도조차 일본말로 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조건이었다. 그러나 한 학생이 말했다. 그런 소아(小我)를 버리고 대의(大義)를 선택하자고, 일본말로 하더라도 우리의 뜻과 의지를 잃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리하여 옥중의 9인과 백남훈은 성탄기도를 일본말로 하기로 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학생들의 눈에서 서러움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후 산발적인 형태로나마 지속적으로 동경에서 검거를 모면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으며, 동경의 2·8독립운동은 국내의 민족지도자들과 학생층에게 즉시 알려졌다. 그리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동경 재일유학생들은 3월 9일에 재동경조선청년독립단 동맹휴교촉진부의 명의로 유학생들에게 학교를 동맹 휴학하고 귀국하여 본국의 운동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띄웠다.

그리하여 2·8운동 이후 5월 15일까지 본국에서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하였다. 일제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3·1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한 한국인 총수는 491명, 그중 유학생이 359명이었다고 한다. 바로 이들에 의해 적도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불타올랐던 젊은 청년들의 독립 의지는 고스란히 국내로 전해지게 되었고, 이들이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각 지역의 만세운동을 이끄는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2·8독립선언서>는 <3·1독립선언서>가 비교적 일제의 도의심(道義心)에 호소하고 있는 데 비해 보다 분석적이고 고발적이며 투쟁적, 대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적국의 심장부 수도에서 학생들에 의해 작성된 <2·8독립선언서>의 주요내용은 일제 침략의 행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병합이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심의 사기와 폭력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식민정책의 야만적 성격을 폭로하였고, 일제와 열강은 마땅히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한국을 독립시켜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2·8독립선언을 3·1운동과 비교해볼 때 가장 큰 역사적 의미는, 첫째,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함께 국내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사실 3·1운동 같은 독립운동이야 언제라도 일어날 것이었으나, 그것을 단축시키고 촉발시켜 3월 1일에 일어나도록 한 것은 2·8독립선언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2·8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수백 명의 일본 유학생들이 본국에 돌아와서 3·1운동에 가담하여 그 범위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것이다.

둘째, <2·8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참고자료가 되었다는 점이다. 최남선은 이광수의 문장을 한층 다듬었으나, 문맥은 같은 것이나 “되도록이면 온건하게 쓰라”는 손병희의 지시에 따라 <2·8독립선언서>의 과격한 표현을 대폭 완화시켰고, 독립을 요구한다는 <2·8독립선언서>의 강력한 의사표시를 <3·1독립선언서>에서는 다소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그리고 선언서 말미의 결의문 4항을 공약 3장으로 바꾸었다.

셋째, <2·8독립선언서>는 정당한 방법으로 민족의 자유를 추구하므로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이며,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라고 주장하였으나 <3·1독립선언서>에는 단 한마디도 혈전을 언급한 일이 없다. 다만 공약 3장 2항에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2·8독립선언은 무단통치에 신음하는 조선 민족의 고통과 강렬한 독립요구를 한층 절실하게 표명하였던 것이다.

넷째, 3·1운동이 고종의 붕어를 계기로 일어난 운동이었으니만큼 거기에는 어딘가 ‘왕조적인’ 민족주의의 흐름이 섞여 있는데, 2·8독립운동은 서구적인 민족적 민주주의에서 일으킨 것이었다. 또 한국의 (체계적인 사상으로서) 민족주의가 배일, 반일에서 연원된 것이라고 하면, 그것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항일의식을 철저하게 가지고 있던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서>에서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투쟁적 혁명적 혹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였다는 점에서 더욱 서구적 성격을 지녔다. 2·8독립선언의 학생들은 전근대적인 애국주의를 혁명적인 서구적 민족주의로 전환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2·8독립선언은 오늘날에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로 100년을 맞이하는 2·8독립선언에 참여한 믿음의 선조들은 오늘 우리에게 물을 것이다. 적도(敵都)의 심장부에서 젊은 청년들이 자신의 청춘과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지켜려 하고, 찾고자 했던 조국의 모습을 진정 오늘의 대한민국이 만들어가고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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