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전달법은 배우고 잘못된 성경관은 경계하라

청중 배려와 다양한 설교형식은 강단에 역동성 부여 … 정작 ‘예수를 설교하지 않는’ 치명적 오류는 주의해야

 

▲ 류응렬 목사
● 와싱톤중앙장로교회 담임
● 고든콘웰신학교 객원교수
● 전 총신대 교수

새로운 설교학은 본문의 내용을 강조하는 전통적 설교에서 벗어나 설교전달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핵심이라 했습니다. 새로운 설교학 운동은 한결같이 기존 설교전달의 한계를 지적하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전통적인 설교가 주로 답을 전달하는 명제적인 설교이기 때문에 청중은 일방적으로 들어야 하는 수동적인 자세를 지적한 것입니다. 전하는 설교자와 듣는 회중이 본문을 두고 대화가 일어나고 삶으로 체험되도록 만드는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강조합니다. ‘은쟁반에 금사과’라는 말처럼 정금이라 해도 걸맞은 그릇을 만날 때 더욱 빛이 나는 법입니다.

전달에 대한 강조는 바람직합니다. 신학에서 보수를 강조할수록 전달면에서 부족함을 보인 것도 사실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강조할수록 본문내용의 이해에 집중하지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는 큰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설교학자들의 주장은 금사과를 더욱 빛내기 위해 가장 좋은 은쟁반을 준비하는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설교학의 주장은 개혁주의 신학의 시각에서 볼 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신학적·해석학적 입장을 보여줍니다. 새로운 운동에 대한 신학적 이해나 비평없이 수용하는 것은 결국 강단에 위협적 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학 운동의 장단점을 살펴보고 수용할 것과 경계할 것을 다루고자 합니다.

최근의 설교학에서 배울 점

최근의 설교학의 장점은 주로 전달법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첫째, 설교에서 청중의 중요성을 살려내었습니다. 일찍이 찰스 스펄전이 강조한 것처럼 설교자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 들고 성경과 시대를 균형있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칼빈 시대의 사람과 오늘날 미국 사람이 다른 것은 프랑스 사람과 아마존 원주민이 다른 것과 마찬가집니다. 다른 교회 부흥회를 인도할 때면 그 교회의 올해 표어나 비전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같은 말씀이라도 회중의 상황을 고려할 때 말씀에 대한 반응을 훨씬 더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청중에 대한 민감한 인식은 예수님의 삶에서도 잘 발견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를 대하시는 예수님과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다릅니다. 복음의 내용이 같고 일어난 변화도 같지만 예수님은 청중에 맞도록 다가가셨습니다. 오늘날 칼빈과 로이드 존스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전할 때 당시와 동일한 은혜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진리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청중과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둘째, 설교형식에서 다양한 기법으로 설교의 흐름과 긴장을 살려내었습니다. 새로운 설교학은 주로 전통적인 3대지 설교를 거부하고 귀납적 설교, 내러티브 설교, 스토리텔링 설교, 대화식 설교 등 다양한 설교형식을 시도함으로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에 대한 중요성에 눈을 뜨게 했습니다. 설교자가 정답을 손에 들고 강단에서 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의 흐름과 긴장을 살려낼 것을 강조합니다. 긴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서론, 긴장과 갈등을 해소하는 진행, 청중 스스로 결론에 이르도록 귀납적으로 설교할 것을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설교학은 성경의 기록양식 가운데 내러티브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시켰습니다. 성경의 다양한 기록양식 가운데 서사적으로 기록된 문학양식은 성경전체의 4분의3에 해당됩니다. 성경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계시의 통로라면, 형식을 단순히 내용을 담은 중립도구가 아니라 관심있게 봐야 합니다. 성경 역사가 단순한 연대기적 기술이 아니라 스토리가 살아있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설교가 본문 중심내용을 주로 대지 형식으로 설교했다면, 새로운 설교학은 본문의 문학양식을 살려낼 것을 강조합니다.

최근의 설교학에서 경계할 점

청중, 다양한 설교형식, 성경의 기록형식에 대한 강조는 성경적 설교자들이 기억할수록 강단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전달기법을 위해 그들의 설교학을 무분별하게 수용하면 위험한 해석학적 혼란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새 설교학에 대한 비판은 주로 그들의 신학적 전제 혹은 해석학적 시각과 관련됩니다.

첫째, 새로운 설교학은 성경의 권위와 저자의 의도에 무관심하거나 거부합니다. 새로운 설교학자들은 대부분 성경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지만, 버트릭은 극단적으로 거부합니다. ‘탈신화화’로 잘 알려진 불트만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따르면서, 설교자가 성경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노력 자체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에게는 설교자의 권위가 성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적 선이해와 방법론에 있습니다. 성경의 의미도 성경 본문을 분석하는 데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가 진행될 때 청중의 의식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성경에 대한 비판은 최근의 설교학을 탄생시킨 크래독도 마찬가집니다. 그의 대표작 <권위 없는 자처럼>에서 크래독은 오늘날 교회에서 기독교정신은 사멸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목회자들은 더이상 성경의 권위에 의존하지 말아야 할 것을 주장합니다. 성경 저자와 본문이 권위를 차지했던 자리에 청중을 두고, 청중이 설교에 참여해서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할 것을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귀납적 설교’는 이런 시대적 상황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도 귀납적 설교에 대한 강조는 있었지만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이 크래독입니다. 귀납적 설교에서는 설교를 복음에서 시작하지 말고 청중의 경험에서 시작할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덜 권위적이고 청중의 기대감을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은 채 진정한 기독교 설교가 가능한가? 본문에 나타난 저자의 의도를 무시한 채 성경적인 설교가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아니오”라고 답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설교할 이유도, 성경에 의존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해돈 로빈슨이 강조한 것처럼 “설교에 놓여있는 권위는 설교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본문에 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설교학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포기했을 때 이미 그들은 설교의 권위를 상실한 것입니다. 미국 트리니티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친 데이빗 라슨은 새 설교학자들을 두고 “성경으로부터 진리를 찾으려고는 하지만 성경이 진리라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다”고 비판합니다.

둘째, 새로운 설교학은 청중의 경험과 역할을 지나치게 강조합니다. 전통적인 설교가 성경본문에 강조점을 두었다면 새 설교학은 청중의 경험에 무게를 둡니다. 본문에 의미를 부여하는 최종 단계는 저자나 성경 본문이 아니라 설교를 듣는 청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는 성경본문보다 청중에 대한 지나친 강조에 있습니다. 인간 체험의 지나친 강조는 기독교 신앙을 기록된 성경의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적 영역에 머물게 할 위험성을 내포합니다. 인간경험을 특별히 강조하는 내러티브 설교를 평가하면서 켐벨은 체험에 대한 강조가 결국 하나님을 지나치게 인간의 체험에 의존하도록 만드는 ‘신학적 상대주의’를 야기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설교에서 체험에 대한 강조가 청중의 마음을 열고 설교에 긴장을 유발할 수는 있지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복음을 해석하는 것은 인간의 체험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이 인간의 상황과 체험을 해석하도록 해야 합니다. 진리를 개인의 실존적 영역에 가두어 버리면 진리 자체의 객관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필요를 발견하기까지 정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켐벨은 크레독의 귀납적 설교 방법을 두고 “결국 설교되는 것은 복음서의 내러티브를 통하여 형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을 중시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정리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설교하지 말고 예수님을 설교하라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최근의 설교학자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설교입니다. 예수님이 비유에서 직접 내용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면서 간접적으로 설교한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도 본문을 직접 드러내지 말고 간접적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설교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바울과 사도들의 설교에서 찾아야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간접 전달 형식을 따르지 않고 직접적이고 명쾌하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설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설교했다”는 베일리의 말이 이 사실을 잘 정리합니다. 진리를 드러내도록 부탁받은 우리에게는 복음을 감출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명확하게 선포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새로운 설교학에서 배워야 할 점과 경계해야 할 점을 보았습니다. 전달에 대한 중요성과 청중에 대한 배려 그리고 다양한 설교형식과 성경기록 양식에 대한 정직한 접근은 배울수록 강단에 역동성을 부여하고 강단을 숨쉬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잘못된 성경관과 본문의 축을 청중으로 바꾸어버린 것은 경계해야할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성경관을 무시하고 강단을 살려낼 수는 없습니다. 형식면에서 예수님의 비유처럼 귀납적으로 설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을 설교하지 않는 엄청난 오류를 보입니다. 찰스 켐벨은 새로운 설교학의 가르침이 결국 기독교 강단을 위축시켰다고 평가합니다.

성경적 설교자는 한 마디로 이렇게 정리하면 되겠습니다. 새로운 설교학자들의 좋은 전달방법은 배우고 잘못된 성경관과 해석학은 경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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